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태복음 4:16)
1943년 겨울, 유럽의 한 강제수용소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여성 신학자 에티 힐레숨은 이런 글을 일기에 남겼습니다. "이 세상에는 분명히 빛이 있다. 그 빛은 이 어둠 속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한다." 그녀는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 일기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서 읽히고 있습니다. 흑암 한가운데서도 빛을 갈망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본능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기원전 7세기에 이 약속을 선포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정확히 그런 처지에 있었습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 9:2). 그런데 이 예언이 선포된 땅이 어디인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해변 길과 갈릴리 지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를 펼쳐 보면, 갈릴리는 북쪽 변방에 자리합니다.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올 때마다 가장 먼저 짓밟히는 곳이 바로 이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내내 이 지역은 침략자들의 첫 번째 먹잇감이었습니다. 심판의 칼이 내려올 때 가장 먼저, 가장 깊이 베인 상처를 입은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본토 유대인들은 이 지역을 은연중에 멸시했습니다.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요 1:46)는 나다나엘의 말은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놀라운 역전을 선언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고통을 받은 자가 가장 먼저 빛을 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심판의 최전선에 서 있던 자들이 구원의 최전선에 서게 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4장은 그 약속이 성취되는 장면을 우리 앞에 펼쳐 놓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가버나움,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속한 바로 그 해변 도시였습니다. 마태는 이것이 우연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이제 살과 뼈를 입고 이 땅에 걷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첫 사역을 시작하신 장면에는 묘한 역설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변방의 어촌 마을에 본부를 세우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밀집한 중심부를 우회하여, 오히려 이방인과 섞여 살던 소외된 변경 지대로 향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포위 전략이었습니다. 기존 이스라엘 체제의 중심부를 향해 외곽에서부터 새로운 나라를 선포하시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선포하신 첫 메시지가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17절)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저 먼 하늘 어딘가에 있는 사후 세계를 떠올립니다. 혹은 하나님의 통치 일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약에도 하나님의 통치는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것이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를 뜻했다면, 그것은 새로운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한 인격, 곧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의 백성들이 불러 모아지는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인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이 한 인물 안에서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바울이 그것을 "아들의 나라"(골 1:13)라고 불렀을 때, 그는 천국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었습니다.
회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는 도덕적 반성이 아닙니다.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방향 자체를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삶의 축을 완전히 다른 곳에 두는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반응은 기존의 세상적 삶에 종교적 항목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포를 제자들을 부르시는 일로 구체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로 부르신 사람들이 놀랍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모두 어부였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어부는 학식이 없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랍비 학교의 입학 허가증도, 성전에서의 발언권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학벌도, 스펙도, 연줄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를 택하신 것과 같은 논리가 여기서도 반복됩니다. 변방의 땅을 택하신 주님이, 변방의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9절). 복음서는 이들이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종종 이 장면을 가지고 "부르심이 있을 때는 즉각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끌어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마태는 핵심 사실만을 간략히 압축하여 기록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 훨씬 더 세밀하게 그려지는데,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를 경험한 후에야 그물을 놓았습니다. 안드레는 요한복음 1장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 이미 예수님을 만나 알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이 보여 주는 것은 인간의 대단한 결단력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진 권위입니다. 그 말씀이 임할 때 사람은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은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습니다(23절). 각종 병, 귀신 들림, 간질, 중풍, 이것들은 단순한 의학적 증상이 아니라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이후 나타난 고통의 증거들입니다. 피조 세계가 탄식하는 소리들입니다.
예수님이 그 병들을 고치셨다는 것은 단순한 의료 봉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표징이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나타난 저주가 물러가고 있음을 몸으로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흑암에 앉은 자들,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빛이 비추이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점령하의 네덜란드에서 코리 텐 붐이라는 여성이 유대인들을 숨겨 주다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녀는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었지만, 그 참혹한 현장에서도 성경을 몰래 읽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훗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빛은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빛이 의미 있는 것은 어둠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필요한 것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를 선택하신 것은 바로 이 논리였습니다. 가장 깊은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찾아오셨습니다. 심판의 상처가 가장 깊은 땅에 구원의 빛이 가장 먼저 비추었습니다. 소외되고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어부들에게 천국의 초대가 먼저 임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문법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천국 복음의 빛은 여전히 흑암 속에 앉은 자들에게 비추입니다. 자신이 소외된 자임을, 고통 가운데 있음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방인임을 고백하는 자에게 빛은 임합니다. 빛을 받기 위한 자격은 단 하나입니다. 자신이 어둠 속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이사야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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