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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태복음

마태복음 -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4. 15.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태복음 3:17)

마태복음 2장과 3장 사이에는 약 30년이 조용히 흘러갑니다. 마태는 그 긴 세월을 단 한 줄도 설명하지 않고 건너뜁니다. 그는 예수님의 전기를 쓰려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록하려 한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는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성취의 서막을 여는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화려한 도시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 광야에서 등장합니다. 마태는 이 장면에서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요한은 바로 그 약속된 선발대였습니다. 그의 옷차림은 낙타 털 옷이었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둘렀으며, 먹는 것은 메뚜기와 야생 꿀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금욕이 아니었습니다.

열왕기하 1장 8절을 보면 엘리야도 털 옷을 입고 가죽 띠를 두른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엘리야처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보라, 내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말 4:5)고 예언했던 바로 그 인물로 자신을 위치시킨 것입니다. 아합 왕 시절 바알의 선지자들이 온 땅을 뒤덮었듯, 요한 당시의 이스라엘도 종교적 외양은 화려했지만 그 실상은 타락과 형식주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때와 다를 것이 없었슾니다.

요한이 굳이 광야에서 세례를 베푼 데에는 깊은 신학적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홍해와 요단강이라는 두 물을 건너야 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가리켜
"그들 모두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고 해석합니다. 물을 건넌다는 것은 이전의 자신이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 곧 세례의 의미였습니다. 약속의 땅은 새롭게 된 자라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약속의 땅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은 정작 이스라엘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땅 위에 있었지만 그 땅에 합당한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들을 다시 광야로 불러냅니다. 광야에서 세례를 주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요한의 사역이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단순한 정결 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출애굽을 준비하는 행위였습니다.

요한의 선포는 간결하고도 날카로웠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절). 이 선포를 듣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군중 앞에서 뜻밖의 말을 던집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9절). 이 말을 듣는 청중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즉 가장 종교적이라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세례를 받으러 왔으면서도 마음속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을 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에 수십 년을 다니면서 '나는 하나님께 쓰임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요한의 선언은 차갑고 명확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10절). 가지만 쳐내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째 심판하겠다는 선언입니다. "타작마당"(12절)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내는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의 자랑과 자격을 뿌리째 심판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
신발 끈 매는 종'의 자격조차 없는 자로 낮추면서 오실 분을 예고합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11절). '성령'과 ''을 따로 구분하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요한의 의도는 다릅니다. 불은 더러운 것을 태워 정결하게 하는 동시에 불순한 것을 심판하는 이중적 기능을 갖습니다. 성령의 사역도 그러합니다.

이사야 1장 25~26절과 4장 4절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내가 내 손을 네게 돌이켜 너의 찌꺼기를 온전히 청결하게 하리라."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의 죄를 불살라 심판하심으로 정결하게 하십니다. 성령 세례는 위안만이 아니라 불의 심판과 정결을 동반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세례를 받으러 요단강으로 오십니다. 요한은 당황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15절). 이 한 문장 안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자신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이 받아야 할 그 자리에 친히 들어오신 것이었습니다. 마치 죄가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죄인의 사형을 대신 받으신 것처럼, 세례 또한 그 십자가의 예표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8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받을 십자가 죽음을 가리켜
"내가 받아야 할 세례"라고 부르십니다. 요단강의 세례와 골고다의 십자가는 하나의 직선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모든 의식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아 사명을 시작하듯, 예수님은 세례를 통해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사역의 본질은 자기 백성을 위해 죽는 것, 중보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렸습니다.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17절).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선포되는 이 순간,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죄인들의 자리에 서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를 향해 걷기 시작하는 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신 것은 아들이 세상의 영광을 취하는 순간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기로 결단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하신 '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일'이 드디어 구체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한 장면 속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이 모두 함께 계십니다. 성부는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셨으며, 성자는 순종으로 죄인의 자리에 서셨고, 성령은 비둘기같이 임하셔서 그 사역이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될 것임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령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자리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세례는 나의 옛 자아가 그 십자가와 함께 죽었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셨던 것은 십자가를 향해 시종일관 걸어가신 예수님의 그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그것이 오늘의 바리새인입니다.

성령의 온전한 지배를 받으며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자부심처럼, 교회를 오래 다녔다는 자부심, 봉사를 많이 했다는 자부심을 쥔 채 광야로 부르시는 요한의 음성을 외면하고 있습니까? 광야의 소리는 오늘도 울립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