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복음 5:33~37)
어느 결혼식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주례 앞에서 서로에게 말합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겠습니다." 하객들은 박수를 치고,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고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그 무엇도 이 맹세를 흔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맺어진 언약들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세월 속에서 부서지는지를 말입니다. 사랑을 맹세했던 입술이 몇 년 후에는 "당신과는 더 이상 못 살겠다"고 말합니다. 이혼 법정에 서 있는 부부는 한때 가장 진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하는 맹세의 실체입니다. 진심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진심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 진심을 끝까지 지켜낼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어린 시절, 조회 시간마다 국기를 향해 손을 얹고 외웠던 문구가 있습니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매일 아침 그렇게 외웠지만, 그 말을 외운다고 해서 저절로 애국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 시절 국가가 국민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사용했던 하나의 장치였을 뿐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말을 반복해서 외운다고, 다짐을 크게 선언한다고, 정말 그 사람의 신분과 성품이 바뀝니까?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결단하고 맹세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곧바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맹세는 다짐의 표현일 뿐, 존재를 바꾸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맹세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아주 교묘한 습관이 있었습니다. 맹세를 하되,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걸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한다", "내 머리를 두고 맹세한다." 이렇게 말하면 나중에 그 약속을 어겨도 책임을 피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런 식입니다. 회사에서 "이 프로젝트, 제 이름을 걸고 완수하겠습니다"라고는 하지 않고, "제 동료의 이름을 걸고 완수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책임은 지고 싶지만, 그 책임의 무게는 지고 싶지 않은 마음, 바리새인들의 맹세가 꼭 이랬습니다.
예수님은 이 위선을 정확히 꿰뚫으셨습니다.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무엇을 걸고 맹세하든,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란 없습니다. 심지어 "내 머리를 두고"라는 맹세조차, 우리는 우리 머리카락 한 올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존재이면서, 무언가를 걸고 약속하려 듭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소리를 한다."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말씀이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만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전도서는 더 깊은 곳을 찌릅니다. 문제는 약속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이전에, 애초에 인간이 그런 약속을 할 처지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새해가 되면 늘 다이어리 첫 장에 큰 글씨로 다짐을 적었습니다. "올해는 반드시 새벽기도 하겠다", "올해는 반드시 성경을 통독하겠다." 매년 그렇게 적었고, 매년 3월이면 그 다이어리는 서랍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문제는 그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애초에 인간의 결심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언약들은 무엇입니까? 노아와의 언약, 아브라함과의 언약, 다윗과의 언약, 이것들은 인간이 하나님과 서로 잘 지키자고 맺은 쌍방 계약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간의 맹세는 언제나 실패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맹세는 다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신실함에 기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자신의 성품, 하나님 자신의 능력에 근거합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갓난아기와 부모의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는 부모에게 "제가 앞으로 효도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할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아기의 다짐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과 책임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언약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우리의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약속은 오늘은 "예", 내일은 "아니오"로 흔들리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고 기도하셨지만, 결국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 순종은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라면 그 고통 앞에서 백 번이라도 마음을 바꿀 만한 순간이었지만, 그리스도는 끝까지 "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진짜 의미는 이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스스로 법칙을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가 얼마나 잘 다짐하고 얼마나 굳게 결심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한 알코올 중독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수도 없이 다짐했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 그러나 그 결심은 매번 무너졌습니다. 그가 마침내 회복의 길에 들어선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는 스스로 이것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라고 인정한 순간부터였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직한 말은 "제가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 위에서, 이미 십자가에서 "예"라고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붙잡고 "옳습니다, 아멘" 하고 응답하는 것이 우리가 매일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우리는 매일 다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죽고, 매일 그분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다시 일어나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린도후서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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