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1~4)
어느 시골 마을에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온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매달 형편이 어려운 이웃집 문 앞에 쌀 한 포대를 몰래 놓고 오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늘 새벽에 조용히 다녀오셨고, 마을 사람들은 그 뒷모습을 보며 "저분이야말로 진짜 신앙인이다"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사님이 넘어져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문병 온 사람들에게 그분이 이런 말을 흘렸습니다. "제가 그동안 쌀을 몇 포대나 가져다 드렸는지 아세요? 이제 그 집도 저를 좀 알아줘야 할 텐데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은밀하게 선행을 베풀던 그 손이,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자기 안에서 훈장을 하나씩 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에서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말씀을 오랫동안 이렇게 읽어왔습니다. '드러내지 말고 은밀히 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갚아주신다.' 그래서 선행은 감추고, 헌금은 무기명으로 하고, 기도는 골방에서 해야 의롭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것으로 충분합니까? 은밀하게만 하면 우리는 하늘 아버지께 상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기 직전, 5장 마지막 절에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이 6장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온전하신 하나님과 연결된 자만이 진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는 애초에 하나님의 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인의 의일 뿐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면, 우리 죄인의 의로는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공개적으로 하지 말고 은밀하게 하라"는 처세술이 아니라, "너희는 애초에 참된 구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근본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제'란 무엇입니까? 사전적으로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도와주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제를 훨씬 더 깊은 이야기 속에 놓습니다. 신명기 15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난한 형제에게 네 손을 펴서 넉넉히 꾸어주라"고 명하시면서 동시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이상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안식의 땅에 왜 가난한 자가 계속 있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약자를 그 땅에 두셨다는 뜻입니다. 이유는 출애굽기 22장과 신명기 24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같은 약자를 학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로 "너희도 애굽에서 종이었고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십니다. 이스라엘 주변에 계속 존재하는 가난한 자들은, 이스라엘 자신이 한때 얼마나 무력한 존재였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을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 건져내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는 살아있는 표지였습니다. 그러니 구제는 단순한 자선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는 신앙 행위였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도울 때마다 이스라엘은 "우리도 저랬었지.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셨지"를 되새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언약의 기억은 다 잊어버리고, 구제 자체를 자기 의로 삼았습니다.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며 구제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 마을의 그 집사님처럼, 겉으로는 은밀했지만 속으로는 자기 공로를 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자"라 부르셨고, "그들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고 하셨다. 여기서 '상'이라는 단어는 '가치 있다',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의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지만, 그들이 원했던 사람들의 칭찬이라는 상은 이미 다 받아버렸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자기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바로 죄인의 본성입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창 11:4).
그렇다면 반대로, 아무도 모르게 완전히 은밀하게 구제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히 순수한 동기로 구제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방법론이 아니라 존재론입니다. "너희는 이런 순전한 구제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 복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곁에 약자들을 두어 언약을 기억하게 하셨듯이, 그 언약의 최종 성취자는 스스로 가장 낮은 약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부요하신 분이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 8:9). 우리는 우리의 구제나 선행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값없이 선물로 받은 자들입니다(롬 3:21~24).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자기 의를 자랑할 것이 없어진 사람인 것입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그 집사님의 이야기에서 만약 그가 그동안 쌀을 가져다준 것이 자기 공로를 쌓기 위함이 아니라, "나도 한때 저렇게 굶주렸던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지"라는 감격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그 감격조차 자신의 순수한 선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자신을 대신해 가장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의 칭찬을 세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정한 구제란 결국 내 손의 선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은 여전히 부끄러운 손이지만, 그 부끄러운 손을 통해 일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때, 그 손끝에서 자랑할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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