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6장 9~15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전쟁고아였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규칙적인 식사와 잠자리는 있었지만, 자신을 향해 "얘야"라고 부르는 이는 있어도 "내 딸아"라고 부르는 이는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한 가정이 그녀를 입양하기로 했습니다. 입양 서류에 도장이 찍히던 날, 아이는 여전히 낯설어했습니다. 새 아버지가 될 사람 앞에서 그녀는 여전히 원장 선생님을 부르듯 존댓말로 어색하게 인사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아이의 눈을 맞추며 말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나를 아빠라고 불러도 된단다. 아니, 그렇게 불러야 한단다. 너는 이제 내 딸이니까." 그 한마디가 소녀의 정체성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규칙에 따라 사는 시설의 아이가 아니라, 사랑받는 관계 안에 있는 딸이 된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첫마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는 바로 이런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는 단순한 호칭 연습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에게 주기도문은 예배의 마침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목사님이 자리에 없어 축도를 할 수 없을 때, 모임을 어떻게든 마무리 지어야 할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기도문을 함께 읊습니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 입에서는 흘러나오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 짧은 문장 안에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시며, 기도하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이런 형식으로 암송하라"는 지시로 받아들이면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오히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히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결의의 선언입니다. 마치 그 입양된 아버지가 "너는 이제 나를 아빠라 불러야 한단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언어를 주십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십계명을 떠올려 보면 이 구조가 더 선명해집니다. 열 가지 계명 중 여덟 가지는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고, 두 가지만이 "~하라"는 적극적 명령입니다. 이는 단지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범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져내어 진정한 안식으로 이끄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대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은 앞서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셨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 "이렇게 하라"로 나아가십니다. 이는 단순한 대조법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이루실 일을 미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은 결코 스스로 이런 기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만 던져 놓고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친히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고, 그곳에서 대속의 죽음을 이루심으로 이 말씀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우리가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일의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이 물리적으로 하늘이라는 공간에만 갇혀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을 완공하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여호사밧 왕도 기도 중에 하나님을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분, 그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어 누구도 맞설 수 없는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이 땅의 모든 물질세계 너머,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신 거룩하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근본적인 딜레마에 부딪힙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거룩하신 분이고, 우리는 죽어 있는 죄인이며 부정한 존재입니다. 거룩과 부정 사이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습니다. 마치 최고 보안 등급의 왕궁 깊은 곳, 왕이 거하는 내실에 평범한 백성이 함부로 걸어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절대적인 단절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죄인이 어떻게 하늘의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의 놀라움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이 넘을 수 없는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단지 다정한 호칭이 아니라 관계의 선언입니다.
이 관계의 뿌리는 출애굽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실 때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 부르셨습니다. 신명기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아들 됨의 자리에서 실패했습니다. 이사야는 소도 자기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정작 하나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고 여호와를 버렸다고 탄식합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그 자리에, 참된 아들이신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 감당하지 못했던 아들의 자리를 대신 짊어지시고, 완전한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기로 작정하신 그 첫걸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에 이르는 길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에서 모든 의를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이, 그분을 통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사소한 단어 선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새 언약을 세우는 죽음이었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어 주신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을 통해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자신과의 관계 안으로 이끌어들이셨습니다.
한 사람이 입양되어 새 가정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는 동시에 그 집안의 다른 형제자매들과도 한 가족이 됩니다. 혼자만 특별한 관계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아버지를 모신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자매로서 "우리"라는 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결코 개인적인 종교 활동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함께 아버지를 부르는 형제자매들과의 연대 안에 존재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고 선언합니다. 이 상속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특별 보너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누리시는 모든 영광을, 아무 공로도 없는 우리가 함께 누리게 된 것입니다. 마치 그 입양된 딸이 친자녀와 똑같이 유산을 상속받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 올라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을 달래고 감동시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많은 말과 반복되는 주문, 인간 편에서의 부단한 노력이 그 특징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정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아 놓으신 후에야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자녀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아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며 많은 말로 하나님을 설득하려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자녀 관계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입양된 소녀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아빠라고 부르는 게 너무 어색했어요. 하지만 그 말을 계속 부르다 보니,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정말 그의 딸처럼 살고 있더라고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자격을 갖추어서 얻어낸 호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값없이 주어진 신분의 고백입니다.
이번 주, 이 기도문을 다시 드릴 때 습관처럼 흘려보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첫마디를 부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얼마나 큰 은혜의 결과인지 잠시 멈추어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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