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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태복음

마태복음 - 기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9.

마태복음 6장 9~15절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시골 요양원에 한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치매가 깊어져 자녀들의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군가 그분의 처녀 시절 이름을 불러드리면, 흐릿하던 눈빛이 순간 또렷해지곤 했습니다. "
김순자"라는 세 글자 안에는 그분이 살아온 팔십 평생의 시간과 관계와 사랑과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이란 그런 것입니다.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를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주기도문을 배우는 성도들이 흔히 넘어가는 지점이 바로 이 첫 번째 간구입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그 뜻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문장 안에 기도의 가장 근본적인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도 가끔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정성껏 기도하면,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란 아버지와 자녀 사이의 언약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대화입니다. 낯선 사람이 아무리 절박하게 문을 두드려도 가족이 아니면 그 집 냉장고를 마음대로 열 수 없는 것처럼, 죄 아래 있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식의 기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기도, 그것이 죄인의 본성이 만들어내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완성된 언약 안에 들어간 자들에게만 "
이렇게 기도하라"는 이 본문이 진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니 주기도문은 도덕적 교훈집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관계 안에서만 온전히 이해되는 기도입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른 후 예수님이 가르치신 첫 간구가 바로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원어에 충실하게 옮기면 '당신의'라는 말이 분명히 들어갑니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기도, 곧 자기 의를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와 정면으로 대조됩니다.

한 청년이 있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는 매일 기도했지만, 그 기도의 8할이
"제 성적이", "제 취업이", "제 연애가"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나쁜 기도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시작점 자체가 다릅니다. 내 필요, 내 상황, 내 감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은 기도의 순서 문제가 아니라 기도자의 존재 방식을 뒤집는 사건입니다. 죄인 된 자기 자신이 죽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기도는 결국 자기 자존심의 확인 절차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
이름'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킵니까? 성경을 펼쳐보면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자신을 여러 모습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는 전능한 하나님(엘샤다이)으로, 아브라함에게는 여호와 이레로, 출애굽 전쟁에서는 여호와 닛시로, 병든 백성에게는 여호와 라파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심판의 하나님, 복수의 하나님, 전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으로도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장면이 출애굽기 3장입니다. 모세가 "
누가 나를 보냈다고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답하셨습니다. 이는 누군가에 의해 존재하게 된 분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며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3장 15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라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니라 언약 관계의 선언입니다. 스스로 계신 분이 자기 마음대로, 그러나 아무 기준 없이가 아니라 자기가 맺은 언약대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마치 왕이 절대 권력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이 백성과 맺은 약속을 스스로 지키기로 결단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
스스로 있는 자'조차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명칭은 하나님의 본성을 부분적으로 표현하는 별명일 뿐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는 이름이 없습니다. 아니, 이름을 가질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름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창세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동물들을 아담에게 데려가 그가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고, 아담이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동물들의 본질을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짓는 행위는 언제나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이 사장님께 별명을 붙이지 않는 것처럼,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곧 다스림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름이라는 개념 자체가 피조물, 곧 이 땅에 속한 존재들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 유한한 이름이 어떻게 온전히 그분을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특정한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 그분의 본성 전체라고 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라고 노래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것은 특정 단어를 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성은 어디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까? 성경의 대답은 하나입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지상에 드러내신 유일한 계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구약 전체를 이 관점에서 다시 읽으면 흥미로운 그림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이름이 온 세상에 전파되도록 능력을 베푸셨고, 자기 이름을 두실 곳을 위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셨으며, 마침내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가리키는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구약에서 하나님이 "
자기 이름을 위해" 일하신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라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더 거룩해지실 수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대답은 명백히 "아니오"입니다. 죄인인 인간에게는 애초에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간구의 주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도록 구할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명예를 자기 힘으로 세워드릴 수 없음을 알기에, 그저 "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높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것, 그리고 아버지 스스로 그 명예를 드러내시도록 간구하는 것뿐입니다.

레위기 22장과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
속되게 하지 말라",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거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거룩이란 속된 것, 망령된 것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구별되신 거룩한 하나님이 어떻게 죄로 오염된 인간과 교제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구약의 제사 제도를 통해 그 길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양에게 안수하고 그 양을 대신 죽이는 것은, 죄가 전가되어 대신 죽임당하는 그림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실 대속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인간이 아무리 정성스러운 종교 의식을 행해도 결코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사건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하나님을 참으로 거룩히 여기실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이 신비를 가장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으나 그것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낮아지심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마침내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방식입니다.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완전하게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독특하고 완전하게 드러났습니다. 인간은 이 일을 결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불가능함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도록 기도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요양원의 할머니 이야기에서 자기 이름 석 자에 반응하던 그 눈빛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 비로소 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결국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아버지의 이름을 참으로 거룩하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저 자신을 부인하며, 그 십자가 안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의 첫 간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리입니다. 내 필요를 아뢰기 전에, 내 문제를 늘어놓기 전에, 먼저 그 이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참된 기도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