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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태복음

마태복음 - 하늘의 뜻, 땅의 기도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6.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복음 6:9~15)

어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장을 남겼습니다. 그 유언장에는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재산을 어떻게 나눌지, 무엇을 지켜야 할지가 세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녀들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고 해보십시오. "
아버지의 뜻은 훌륭하지만, 나는 내 뜻대로 살겠어." 그 순간 그 유언장은 그 자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종잇조각이 되어버립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구절 앞에서 우리는 바로 이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남기신 뜻, 곧 그분의 언약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내 삶의 유언장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저 존중은 하되 내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라보다 먼저 뜻을 구하라? 이상한 순서처럼 보입니다. 주기도문은 먼저 "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구하게 하고, 그 다음에 "뜻이 이루어지이다"를 구하게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거꾸로여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얼마나 광대한 개념입니까? 온 우주와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에 비하면, 나라 하나가 임하는 것은 오히려 더 작고 구체적인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순서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나라가 임하는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그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과 땅에서 완전하게 성취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큰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싶다면 그 강의 발원지를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다면 십자가라는 그 발원지를 먼저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낯선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미가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그의 사자들과 싸웠고, 용은 패배하여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마치 뉴스 속보처럼 시간 순서대로 읽으려 하면 오히려 길을 잃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입니다. 묵시란 마치 산 정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듯,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이미 완결된 하나님의 계획 전체를 한눈에 보여주는 방식의 계시입니다.

그 전쟁에서 패배하여 쫓겨난 용, 그가 바로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고 성경은 밝힙니다. '옛 뱀'이라는 표현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으로 우리를 곧장 데려갑니다. 마치 오래된 상처에 다시 손을 대듯, 이 표현은 창세기의 그 사건, 뱀이 하와를 유혹하던 그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마치 회사에서 쫓겨난 직원이 앙심을 품고 경쟁사로 가서 옛 회사를 무너뜨리려 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하늘에서 패배한 마귀는 그 복수심을 안고 땅으로 내려와, 이번에는 사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하나님께 계속해서 도전장을 내밉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은 결국 "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라"는 제안이었습니다. 그것이 사탄의 오래된, 그러나 결코 성공하지 못한 전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마귀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결말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하실 것이라 말씀하셨고, 요한계시록도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져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승리는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미가엘이라는 천사장이 특별히 용맹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전쟁의 승패가 최전방 병사의 용맹함이 아니라, 이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맺어진 동맹과 전략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심판의 말씀 가운데 이미 언약을 심어두셨습니다. "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장 15절의 이 약속이야말로 하늘의 전쟁의 결과를 미리 결정짓는 씨앗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 하늘에 계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귀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행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치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된 지도라도, 그 길을 실제로 걸어본 사람만이 그 지도가 맞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는 언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 길을 걸으심으로써, 십자가까지 걸어가심으로써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직해져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거룩함이라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합니다. 베드로전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것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까? 마치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저는 사람에게 "
이제부터 똑바로 걸어라"고 명령한다고 해서 그가 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스스로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 편에서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신에게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진실로 믿어진 사람은 오히려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결코 이것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먼저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려면, 무엇보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원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는 채로 기도하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가려는 방향과 정반대로 가는 기차를 타놓고 왜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결국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실망하고, 마침내 하나님을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진짜 기도는 자기 뜻을 손에 쥔 채로 하나님의 뜻을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두 손에 이미 다른 물건을 가득 쥐고서 새로운 것을 받으려 하는 것과 같아서, 결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자기 뜻을 완전히 내려놓은 사람만이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는 우리에게 "
너희가 이렇게 실천하라"고 주신 숙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오직 자신만이 이것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이 기도로 기도하셨고, 친히 이루셨고, 그 이루신 것을 자기 백성에게 값없이 적용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인 언약의 말씀은 우리가 만들어내야 할 성취 목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완성된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믿어진 사람에게는 부담이 아니라 감격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루어야 할 짐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은혜에 대한 감사가 우리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이 기도는 결국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 뜻을 이룰 수 없는 자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이루셨고, 이제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 성취된 뜻을 살아냅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세 번째 간구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