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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태복음

마태복음 - 기도, 나라가 임하시오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8. 2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태복음 6:9~15)

어느 마을에 오래된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그 우물가에 자기 이름을 새긴 돌을 하나씩 놓아두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물가는 이름 새긴 돌들로 가득 찼고, 사람들은 자기 돌이 더 크고 더 잘 보이는 자리에 있기를 바라며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습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도 결국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창 11:4)라는 그 한마디 안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이름을 새기고 싶어 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놀랍게도 첫 번째 간구로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셨습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높아지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간구가 오늘 우리가 함께 들여다볼 말씀입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이 두 간구는 사실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자리,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오랫동안 타지에서 고생하며 살던 아들을 위해 집을 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단지 아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방의 온도를 아들의 체질에 맞추고, 창문의 방향을 아들이 좋아하는 아침 햇살이 들도록 배치하고, 책장에는 아들이 즐겨 읽던 책들을 미리 꽂아 둡니다. 그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품은 마음 전체가 담긴 처소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모세와 미리암이 홍해를 건넌 뒤 부른 노래에도 이와 같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이유는 단지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를 주시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을 '주의 처소'로 삼으시는 것, 곧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 처소 됨을 보여 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이사야는 훗날 이 하나님을 목자로 묘사합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사 40:11).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 중에도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단 2:44)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세상 나라들이 흥망을 거듭하는 그 한가운데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고 외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은 늘 다스리고 계셨는데, 왜 굳이 "가까웠다"고 선포하셔야 했을까요? 여기에 이 강해의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막연한 '하나님의 통치 일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처소로 삼으시는 구체적 사건입니다. 그 사건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골로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 1:13).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는 곧 아들의 나라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나라를 열고, 그 나라로 사람을 옮기실 수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 치하에서 「나를 따르라」를 쓰며 '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구분했습니다. 값싼 은혜란 회개 없는 용서, 십자가 없는 은혜,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은혜입니다. 반면 값비싼 은혜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지만, 그것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신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값없이 열리지만, 그 문을 여는 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값이 치러졌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재물이 많은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가진 것을 팔아 나누어 주라고 하셨고, 그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눅 18:25).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그림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리 낙타를 작게 접고 밀어 넣어도, 그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의 문제입니다. 이는 재물 많은 사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
그래도 열심히 회개하고, 착하게 살고, 믿음으로 간구하면 결국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시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진리는 더 냉정합니다. 사람 편에서는 어떤 조건과 근거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 18:27)는 말씀은, 사람이 애쓰면 결국 되더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모든 노력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서 하나님은 에덴을 쫓겨난 아담에게 "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마치 굳게 잠긴 철문 같은 이 장면은,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그 길을 다시 열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언젠가 하나님 편에서 그 문을 여실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찢어짐으로 열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강단에서 가장 많이 들리는 말이 무엇입니까?
"행복하게 하시려고", "형통하게 하시려고", "복 주시려고"라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한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말들이 하나님 나라 자체보다 이 땅에서의 안락함을 복음의 중심에 놓을 때 생깁니다.

마치 아들이 아버지가 정성껏 지어 준 처소에는 관심이 없고, 그 집 마당에서 잠깐 놀 장난감에만 눈이 팔린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윤리운동이나 봉사활동, 사회적 선행을 열심히 한다 해도,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빠져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배와 헌금과 봉사가 있어도, 그 중심에 그리스도의 의가 없다면 마찬가지입니다. 인본주의는 언제나 종교적인 얼굴을 하고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단순한 소원 빌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스스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항복 선언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이며,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나라를 우리에게 덮어 주시기를 구하는 간청입니다.

이 기도를 진실하게 드리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서 자기 몫을 넓히고 자기 이름을 세우는 일에 집착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나라의 왕이 자기 안에 있는 세상적인 것들을 하나씩 밀어내는 과정을 살아가며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단번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우리 안에서 계속되는 항복의 여정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