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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말씀 묵상/마태복음

마태복음 - 하늘에서 내리는 것으로 산다는 것, 넷째 기원의 비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9. 3.

마태복음 6장 9~15절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어떤 사람이 아침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
하나님, 오늘 저에게 부족함이 없게 해 주세요. 밥벌이 잘 되게, 사업 잘 되게, 우리 가족 아무 탈 없게 해 주세요." 또 다른 사람은 같은 문장을 놓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겉으로 보면 두 기도는 거의 같아 보입니다. 둘 다 오늘의 필요를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뒤의 기도만을 가르치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차이를 알아야 주기도문의 넷째 기원이 열립니다.

우리는 흔히 주기도문을 두 덩어리로 나눕니다. 앞의 세 기원인 이름이 거룩히, 나라가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이다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고, 뒤의 세 기원인 양식, 죄 사함, 시험은 '나를 위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마치 예배 시간을 반으로 나눠서, 앞부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뒷부분은 헌금 봉투를 채우는 것과 비슷한 구조로 이해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구분법을 그대로 따라가면 곧바로 성경과 부딪힙니다. 같은 산상수훈 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31~32).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정말로 '나의 생계를 위한 기도'라면, 예수님은 방금 자신이 가르치신 기도를 스스로 부정하시는 셈이 됩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넷째 기원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는 구절에서 우리는 종종 '먼저'를 순서로 읽습니다. 1번 하나님 나라, 2번 먹고 사는 문제, 그런데 이렇게 읽으면 결국 신앙은 '축복을 받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전락합니다. 마치 자녀가 "엄마, 저 심부름 먼저 할게요. 그러면 용돈 주실 거죠?"라고 계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는 순서가 아니라 무게 중심을 말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되는 중심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기도라고 예수님은 못 박으셨습니다. 그러니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단순히 '내 생활비를 위한 기도'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이방인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이 기도의 뿌리를 찾으려면 출애굽 시대의 광야로 가야 합니다. 백성이 먹을 것이 떨어져 원망하자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출 16:4). 그런데 이 만나에는 아주 특이한 규칙이 붙어 있었습니다. 하루치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려 이틀치를 쌓아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출 16:19~20). 오직 안식일 전날에만 이틀치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출 16:22~27).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장이 불가능한 양식으로 40년을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이었을지 말입니다. 오늘 밤 창고 문을 걸어 잠그고 안심하고 잘 수가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정말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올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불편한 삶이 아니라, 사실은 매일 하나님을 새로 신뢰해야만 하는 삶이었습니다.

신명기는 이 훈련의 목적을 분명히 밝혀줍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만나는 배를 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만나를 통해 하나님이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너를 살게 하는 것은 이 떡이 아니라, 이 떡을 매일 보내주시는 나 여호와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곳간에 곡식을 가득 채워두면 사람은 곳간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매일 손을 벌려야만 산다면, 사람은 결국 그 손을 채워주시는 분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 예수님이 40일 금식 후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는 정확히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배고픔을 무기 삼은 유혹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신명기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예수님이 거부하신 것은 배고픔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진짜 양식이 무엇인지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마치신 뒤 제자들이 음식을 권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그리고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 나아가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나 사건이 향하고 있던 최종 목적지를 만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니라"(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매일 거두어 먹던 그 떡은, 결국 하늘에서 내려오신 참 떡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거리를 걷다 보면 많은 교회 간판과 전도지에서 비슷한 문구를 만납니다. "
행복한 교회를 꿈꿉니다." 신앙생활의 목표가 마치 이 땅에서 웃으며 평안하게 사는 것인 양 선전됩니다.

여기 사업이 부도가 난 두 성도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죠. 저는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요." 그의 신앙 안에서 하나님은 행복을 배달해 주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무너진 사업체 앞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저를 지금까지 살게 하신 것이 제 사업 수완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같은 시련이지만, 두 사람이 평생 구해 온 '양식'이 전혀 달랐기에 그 반응도 전혀 달랐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세요"로 슬그머니 바꾸어 버리면, 우리는 예수님이 분명히 경계하신 이방인의 기도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결국 우리 가정의 평안과 사업의 형통을 위한 수단이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복음의 언어를 빌려 쓴 종교적 욕망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가 진짜로 겨냥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로마 감옥,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편지를 씁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상황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살게 하는 것이 감옥 밖의 자유나 넉넉한 식탁이 아니라, 자기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역시 같은 고백을 남깁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이 고백을 우리의 오늘로 가져와 봅시다. 통장 잔고가 그대로여도, 우리가 이 기도를 진심으로 드릴 수 있다면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우리의 눈은 완전히 바뀝니다. 우리는 지금 그저 밥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오늘까지 살게 하신 이가 당신이시며, 내일도 저는 당신의 뜻 안에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셋째 기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와 하나로 이어지는 기도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씁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광야의 제사장들에게는 자기 소유의 땅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며, 그 삶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바로 그 제사장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창고를 짓지 못하고 매일 손을 벌려야 했던 광야의 백성처럼, 우리 역시 오늘 하루 우리를 살게 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고백하며, 그 은혜로 오늘 하루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내는 것입니다. 냉장고가 비어 있든 가득 차 있든, 이 기도가 진짜로 향하는 곳은 우리의 배가 아니라 우리를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