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6장 9~15절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옛날 한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밤이면 사람들은 그에게 이렬게 부탁하곤 했습니다. "제발 저 바다에 풍랑이 일지 않게 해주세요." 하지만 등대지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바다를 잠재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등대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 그래서 폭풍 한가운데서도 배들이 암초에 부딪히지 않고 항구로 돌아올 길을 찾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여섯 번째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기도를 "제 인생에 풍랑이 일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뜻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 기도의 진짜 의미는, 풍랑 자체를 없애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풍랑 속에서도 우리가 암초, 곧 사탄의 통치에 부딪혀 파선하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기도를 깊이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에 나오는 하나의 당혹스러운 모순을 풀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그런데 같은 장 13절에서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기뻐하라던 시험과,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다는 시험, 이 둘은 서로 다른 말인가요?
답은 번역된 우리말 "시험"이라는 한 단어 뒤에 두 개의 서로 다른 헬라어가 숨어 있다는 데 있습니다. 2절과 12절의 "시험"은 '시련'입니다. 마치 근육이 저항을 받아야 강해지듯, 믿음이 압박을 받아 더 단단해지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반면 13절의 "시험"은 '유혹', 곧 죄를 짓도록 끌어당기는 미혹을 가리킵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바로 이 후자,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유혹의 가장 오래된 장면은 창세기 3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의 모든 열매를 허락하시되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금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모습을 한 사탄이 다가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유혹의 핵심은 금지된 과일 하나를 먹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핵심은 "내가 하나님이 되어, 내가 선과 악을 규정하는 자가 되겠다"는 욕망이었습니다.
이 욕망은 에덴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가장 유행하는 문구를 떠올려보십시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네 안의 진리를 따르라", "누구도 너를 판단할 수 없다." 이것들은 세련된 현대어로 포장되어 있을 뿐,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 하와에게 건넨 그 유혹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살아가려는 것, 이것이 지금도 인류 전체가 빠져 있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인간이 스스로 그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낱낱이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중요한 논리가 하나 있습니다. 시험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죄인 됨의 증거인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분이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겨 스스로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비유하자면, 감염병 병동에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는 의사가 오직 환자들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그 병동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유혹을 받으셨지만 단 한 번도 거기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단지 "유혹을 잘 참아낸 모범 사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전한 통치를 이 땅에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 '악'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불행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같은 표현이 '악한 자'로, 마가복음 4장 15절에서는 아예 직접적으로 '사탄'으로 번역됩니다. 즉 이 기도는 단순히 "나쁜 일이 없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사탄의 통치 아래서 나를 건져내 주세요"라는 구출의 간구입니다.
이것은 마치 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의 기도와 비슷합니다. 그가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은 술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중독의 지배력 자체로부터 완전히 놓여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세 가지 지배 체계로부터의 해방을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유혹)하지 않으신다면서, 어째서 성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고 말합니까(창세기 22장)?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시험하셨다고 말합니까? 여기 쓰인 '시험'은 테스트, 곧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한 검증이지 죄로 유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 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정말 믿음이 있는지 몰라서 알아보려는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보석 감정사가 이미 진품임을 알고 있는 다이아몬드를 굳이 강한 빛 아래 비추어 그 광채를 모두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모리아 산까지 이끄셔서, 훗날 그 땅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고(역대하 3:1), 그 성전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언약의 실체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은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연약함 너머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더 선명히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극심한 고난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더 분명히 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 12:8~10).
옛 은세공업자들은 용광로 속에서 은을 정련할 때, 불순물이 완전히 사라져 자신의 얼굴이 그 은 표면에 비칠 때까지 불 옆을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시련도 이와 같습니다. 목적 없이 우리를 태우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의 불순물인 자기 의존, 자기 확신, 자기가 선악의 기준이 되려는 그 오래된 욕망을 걷어내시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비치도록 하시는 과정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은 자주 오해받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많은 사람이 이 '피할 길'을 시련 자체를 벗어나게 해주는 비상구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어의 의미는 다릅니다. 그 '피할 길'은 시련을 피하게 하는 다른 통로가 아니라, 바로 그 시련을 끝까지 감당해낼 힘을 의미합니다.
마치 수영을 처음 배우는 아이 곁에서, 아버지가 물을 없애주지는 않지만 아이가 물에 완전히 빠지지 않도록 팔을 받쳐주는 것과 같습니다. 물은 여전히 거기 있습니다. 두려움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손이 있는 한, 아이는 결코 그 물속에서 익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삶의 풍랑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랑 한가운데서도 사탄의 통치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지 않게 해달라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붙들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수한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것에서 벗어나려 애쓴 흔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 시험들을 통해 자신이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 사탄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그 길을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마지막 간구를 올릴 때, 우리는 단지 "제발 나쁜 일이 없게 해주세요"라고 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사탄의 머리를 밟으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붙들고, 오늘 우리 삶의 폭풍 속에서도 그 등대의 불빛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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