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6장 9~15절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한 은행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달 대출 이자를 계산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상사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은행에 진 빚, 그거 다 없던 일로 하겠네. 원금도, 이자도, 전부." 처음에 그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는 자신에게 만 원을 빌려간 동료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돈 언제 갚을 거야? 이자까지 쳐서 가져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말합니다. "저 사람 제정신이야?"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기도문 다섯 번째 간구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이 부조리함입니다.
주기도문의 앞선 간구들, 곧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을 구하는 기도,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지나 예수님은 이제 죄 용서를 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이 기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죄'라는 단어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죄란 단순했습니다. 율법에 적힌 목록이 있고, 그것을 어기면 죄인이고, 어기지 않으면 의인이었습니다. 살인하지 않았으니 괜찮고, 간음하지 않았으니 문제없다는 식입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정해놓은 몇 가지 금기 사항을 지키면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 즉 죄는 행동의 목록이 아니라 행동이 나오기 이전의 마음 상태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살인이라는 행위가 죄의 본질이 아니라, 그 살인을 낳는 마음의 상태, 즉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면, 나무에서 썩은 사과 하나를 따서 버린다고 그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열매가 아니라 뿌리입니다. 죄를 열매 관리하듯 접근하면 평생 이 죄 저 죄를 쳐내는 데 급급할 뿐, 뿌리에 흐르는 하나님과의 원수됨은 그대로 남습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우리의 근본 문제는 행동이 아니라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회복시킨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절) 한국어 어순으로 읽으면 앞부분이 마치 조건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먼저 남을 용서해야, 그래야 하나님도 나를 용서해주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이 기도는 결국 자기 공로로 용서를 얻어내는 거래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헬라어 원문의 어순 문제입니다. 헬라어나 대부분의 서구 언어에서는 주절이 먼저 나오고 조건절이나 부연 설명이 뒤에 따라옵니다.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순서를 이렇게 바로잡으면 우리 머릿속에서 생각의 중심축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중심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라는 간구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주께서 저를 용서하신 그 용서를 따라, 저도 저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겠습니다." 조건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자격을 갖추기 위한 선행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네 방 청소하면 용돈 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이미 용돈을 넉넉히 받은 자녀가 감사한 마음에 자발적으로 방을 청소하는 것의 차이와 같습니다.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그 동기와 순서는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거래이고 후자는 사랑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후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원리를 마태복음 18장의 비유로 더 선명하게 설명하셨습니다. 한 종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한 달란트가 노동자가 쉬는 날 없이 16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액수라고 하니, 일만 달란트는 그야말로 평생, 아니 몇 생애를 다시 살아도 갚을 수 없는 천문학적인 빚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로또 1등을 수백 번 맞아야 겨우 갚을까 말까 한 금액이라고 상상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이 빚을 그냥 탕감해주었습니다. 종이 무릎 꿇고 사정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가 갚을 수 있는 방법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왕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나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즉 노동자 백 일치 품삯 정도 빚진 동료의 멱살을 잡고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백 데나리온도 결코 적은 돈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만 달란트와 비교하면 그 규모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대략 계산해도 일만 달란트는 백 데나리온의 몇 십만 배에 달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분노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저 종은 왜 저렇게밖에 못하나, 자기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몰랐나?" 그런데 예수님이 이 비유로 정말 하고 싶으신 말씀은, 우리가 바로 그 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죄의 빚은 일만 달란트입니다. 도무지 갚을 길이 없는 빚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저지른 사소한 잘못, 백 데나리온짜리 상처는 절대 놓아주지 못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 18:35)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다시 조건적 용서, 즉 "내가 용서해야 하나님도 용서하신다"는 거래로 돌아가버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참뜻은 이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애초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진짜로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아본 사람은, 백 데나리온짜리 빚 앞에서 마음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증거요 열매입니다. 마치 불이 뜨거움을 증명하듯, 진짜 용서받은 마음은 용서하는 삶으로 드러납니다. 한 상담 사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큰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여전히 다른 사람에게 인색하고 계산적이라면, 우리는 그가 정말 그 빚의 무게를 실감했는지 의심하게 됩니다. 진짜로 죽음 직전에서 살아난 사람은 이후의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의 무게를 진짜로 실감한 사람은, 타인의 작은 잘못을 붙들고 늘어질 여유가 없습니다. 그 사람 안에는 이미 받은 은혜가 넘쳐서 밖으로 흘러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원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바울은 자신이 남에게 뭔가를 베푸는 시혜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미 갚을 수 없는 은혜의 빚을 진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평생을 걸었습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의 무게가 그를 그렇게 움직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삶의 근거는 자신의 선한 행실이나 도덕적 우월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선언이 우리 존재의 기초입니다. 이 기초 위에 서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타인을 향해 손을 펴고 용서를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이 기도는 하루에 한 번 드리고 끝나는 기도가 아닙니다. 매일매일 우리는 새롭게 우리의 죄를 자각하고, 새롭게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새롭게 그 용서를 이웃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훈련입니다. 마치 근육이 매일의 운동으로 단련되듯, 용서하는 마음도 매일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세울 때 자라납니다.
내가 아직 살아있다고, 내가 옳다고 내세우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 나의 관계마저 멀어지게 만드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얼마나 크고 놀라운 용서를 이끌어내셨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결국 본문 12절의 이 다섯 번째 간구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단순합니다. 나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입니다. 그 사실을 매일 기억하는 사람만이, 나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형제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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