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창세기 22:8,16)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스물다섯 해 동안 아이를 기다렸습니다. 의사는 진작에 포기하라 했고, 주변 사람들은 입양을 권했으며, 아내는 몇 번이나 눈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래도 그는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백 살 노인의 품에 안긴 갓난아이입니다. 그는 그 아이의 이름을 '웃음'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하나님이 그 아버지를 부르셨습니다.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아이를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거라.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려라." 이것이 창세기 22장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보내진 편지입니다.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창세기의 앞부분을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창세기 22장이 처음이 아닙니다. 훨씬 앞서,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쫓겨나던 날, 하나님은 이미 하나의 약속을 남기셨습니다.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약속은 피 흘리는 짐승의 가죽으로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를 덮어주시던 장면에서 처음 그림으로 그려졌고, 죄인들을 품에 안은 채 홍수 속으로 잠겨들던 노아의 방주에서 조금 더 선명해졌으며, 쪼개진 제물들 사이로 홀로 걸어가시던 하나님의 그림자에서 마침내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창세기 15장의 그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짐승들을 쪼개어 마주 놓았을 때, 고대 근동의 언약 관습에서라면 두 당사자가 함께 그 사이를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 행위는 '내가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쪼개져도 좋다'는 맹세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빠졌고, 오직 하나님만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일방적인 언약이었습니다. 어기면 쪼개지는 것은 하나님 혼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골고다에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쪼개지셨습니다. 이것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입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불안 때문이었고, 다음에는 위로 때문이었으며, 그다음에는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기도도 했고 헌금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서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았고, 자기가 내리는 결정으로 움직였으며, 하나님은 그 결정들을 뒷받침해주시는 든든한 후원자 정도로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는 받아들였지만, 주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자입니다. 그러나 주(主)는 주인입니다. 복음에는 이 두 가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구원의 선물과 순종의 요구, 은혜와 책임, 축복과 요구.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합니다.
동전을 한 면만 가질 수 있을까요? 아무리 얇게 잘라도 동전에는 여전히 양면이 있습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이들이 한 면만 가지려 합니다. 은혜는 원하지만 복종은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혜택은 누리되 십자가의 삶은 피하려 합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걱정거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예수님의 비유가 하나 나옵니다. 하루 종일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말합니다. "어서 앉아서 먹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 저녁을 먼저 차려놓고, 내가 먹는 동안 곁에서 시중을 들어라. 그러고 나서 네가 먹어라"고 합니다. 그리고 종이 그 모든 것을 다 했다 해도, 주인에게 사례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종의 신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목사님은 어떻게 우리를 종이라 하십니까?" 성도의 신분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세상의 그것과 다릅니다. 그것은 완전한 일체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의 뜻이 되는 전적인 순종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종의 모습을 입고, 아버지의 말씀에 십자가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의 삶도 그 아들을 닮아가야 합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종처럼 순종합니다. 이것이 역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집의 종이 아침에 일어나 나름의 하루 계획을 세웠습니다. 밭을 갈고, 논에 물을 대고, 거름을 주는 순서로 효율적으로 일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갑자기 "지금 당장 거름부터 주고 와라"고 했습니다. 종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주인님, 저도 생각이 있습니다. 제 계획을 먼저 들어보세요." 아닙니다. 종은 아무리 자기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해도 주인의 명에 따릅니다. 하나님의 쪼개짐은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합니다. 주도권의 이전, 곧 통치권이 '나'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하나의 큰 산이 아닙니다. 세 개의 언덕으로 이루어진 긴 여정입니다. 첫 번째 언덕은 이스마엘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다 지쳐 스스로 만들어낸 아들이었습니다. 인간의 계획, 인간의 노력, 인간의 가능성으로 빚어낸 해결책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자신감, '나는 남들보다 낫다'는 자부심,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내가 이루겠다'는 계획들, 하나님을 후원자로 삼아 자신의 인생을 경영하려는 그 모든 시도들이 우리 안의 이스마엘입니다. 첫 번째 언덕은 그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언덕은 이스마엘과 이삭이 함께 공존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후에도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곁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인지상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셨습니다. "이스마엘을 내쫓으라." 새 사람과 옛 사람이 함께 공존하며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거듭난 이후에도 우리는 자꾸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세상적인 힘과 성공의 원리로 살고 싶은 욕망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바울의 탄식처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끊임없이 싸웁니다. 두 번째 언덕은 그 싸움에서 이삭의 편을 드는 것, 이스마엘을 내쫓는 결단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언덕이 가장 높습니다. 이삭 자체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리아 산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그는 세상적인 성공을 거부했습니다. 대형 교회의 청빙도 마다하고, 작은 교회에서 성실하게 섬겼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고, 새벽마다 기도했으며,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의 삶은 어느 모로 보나 경건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경건한 삶이 조금씩 그의 자부심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타협하는 동료 목사들을 은근히 내려다보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설교 후 성도들의 반응에 민감해졌고, 자신의 희생과 헌신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경건이 목적이 된 것이 아니라, 경건이 자기 영광의 수단이 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삭을 바치는 시험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 그 선한 것조차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봉사가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지식이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가정이, 건강이, 신앙의 연조가, 심지어 오랜 기도 생활도 이삭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해지는 순간, 하나님은 그것을 내놓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세 번째이자 가장 어려운 시험입니다.
2절의 '사랑하는 독자'에 쓰인 히브리어 '예히드카'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집중하여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이삭 사랑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삭을 드렸습니다. 이삭을 주신 하나님이 이삭보다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80km가 넘습니다. 나귀를 타고도 사흘 이상 걸리는 거리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긴 길을 아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그 침묵의 사흘을 상상해보십시오. 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잠이 들고, 아버지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그 별들을 말입니다. 처음 부르심을 받았던 날의 기억, 무수히 넘어지고 실패했던 날들의 기억, 그리고 마침내 이삭이 태어나던 날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수천 번 마음이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었다고 합니다. 그 믿음은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쌓아온, 실패와 회복의 긴 역사 위에서 형성된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가 이삭을 향한 사랑보다 깊어질 때, 비로소 이삭을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 자리에 이르는 것이 신앙 여정의 목적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통과하자 하나님은 복을 선언하십니다. 그 핵심이 이것입니다.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이 표현은 이후 리브가에 대한 축복에도 등장하고(창 24:60), 마침내 예수님의 입을 통해 교회를 향한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난하주를 보면 '음부의 권세'는 '음부의 대문'입니다.
대적의 문을 부수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화려한 삶이 아닙니다. 강력한 힘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쪼개지는 삶입니다. 자신의 손해와 상함을 감수하며 원수를 위해 내어주는 삶입니다. 죽어야 할 이삭을 대신하여 제물이 된 어린양처럼, 자기 자신보다 귀한 아들을 드린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두 그림은 정확하게 같은 그림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필요 없어. 네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 이것이 대적의 속삭임입니다. 그 속삭임에 속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항복하는 삶, 그것이 대적의 문을 부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아 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쪼개지는 자로 성숙되어 가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야고보서 2장 21절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 두 진술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진리의 두 면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열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받은 성도의 삶 속에서는 반드시 순종의 행함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쪼개짐은 반드시 성도의 쪼개짐을 만듭니다. 샘물이 흘러나오듯, 은혜는 반드시 삶으로 흘러넘칩니다.
존 스토트는 오늘날 교회가 '복음의 가시성'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성도의 삶 속에 존재하지 않는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성도의 삶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영화 용어 중에 '페르소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래는 무대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인데, 오늘날에는 감독의 의중과 사상과 인품을 그대로 담아내는 특별한 배우를 가리킵니다. 임권택 감독에게는 오정해가, 이준익 감독에게는 정진영이, 장예모 감독에게는 공리가 그런 배우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페르소나로 이 땅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볼 때 하나님의 성품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중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느껴야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모리아 산을 올랐습니다.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는 대답했습니다. "아들아,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리고 하나님은 수풀에 뿔이 걸린 한 마리 수양으로 준비하셨습니다. 그 수양이 바로 우리를 위해 쪼개지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위해 쪼개졌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드리겠느냐. 네 안의 이삭은 무엇이냐." 모리아 산에서 온 그 편지는, 오늘도 우리 각자의 이름 앞에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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