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창세기 22:5,8)
어느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10여 년 전만 해도 수천억 원을 움직이던 사업가였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무너지면서 하루 먹거리조차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몸에는 병이 들어 외출도 어렵게 되었으며, 자녀마저 큰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인생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그리고 한꺼번에 손을 떠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분이 생활비를 쪼개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제 한 달 치 생활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목소리는 밝았습니다. "이제는 가난도, 무시도, 그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저를 지어 가고 계신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그리고 그 달에도 남은 돈을 쪼개 돕던 이들에게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한 달 먼저 굶으나 한 달 뒤에 굶으나 마찬가지인데, 그 돈을 아끼자고 다른 이를 굶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 고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저 얼굴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신(神)을 갖습니다. 취업이 되게 해 달라고, 병이 낫게 해 달라고,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고, 신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의 손에는 대부분 자신의 필요 목록이 들려 있습니다. 종교도 이 풍경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 불교계의 원로 휴암 스님은 일찍이 이 풍경을 향해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복에 환장한 불교인들아, 너희 스승은 진리를 찾겠다고 왕궁을 버리고 고행의 자리로 갔거늘, 너희는 진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스승의 이름을 부르며 스승이 버린 것을 달라고 조르고 있구나." 불교를 향한 이 외침이 기독교를 향한 외침으로도 그대로 읽혀집니다.
기독교 안에도 '하나님이 내 필요를 다 채워 주신다'는 식의 가르침이 넘쳐납니다. "믿으면 부자가 된다,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 헌금을 드리면 사업이 잘 된다." 신이 내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로 축소되는 순간, 종교는 더 이상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이 신을 이용할 뿐입니다.
성경에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들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떠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지, 하나님이 내 필요를 미리 다 준비해 두신다는 뜻이지.' 그러나 이 말이 처음 태어난 이야기 속으로 실제로 걸어 들어가면, 그 뜻은 우리가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나무를 쪼개고, 아들을 데리고 길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사흘 거리에 있는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그가 그 산에서 해야 할 일은 아들을 번제물로, 즉 불에 태워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백 세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나이에,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삭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의 결실이었고, 하나님이 친히 약속하신 아이였으며,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전부였습니다. 그 전부를 내려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사흘 길을 걸으며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성경은 그의 내면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기록합니다. 산 아래에 하인들을 남겨두고,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의 등에 지우고, 자신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함께 산을 올랐습니다. 그때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대답이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것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아브라함은 그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몸으로 배워왔습니다. 강대한 왕 앞에서도 당신의 사람을 지켜내신 하나님, 사람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자리에서 비로소 새 생명을 탄생시키신 하나님, 한 번도 약속을 철회하지 않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이삭에 대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와 내 약속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약속이 되리라."
아직 결혼도 못 한 이삭이 죽는다면 그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삭을 죽게 내버려 두실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설령 죽이신다 해도 반드시 다시 살려 내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칼을 들어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눈을 들어 살피니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양이 이삭을 대신하여 바쳐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필요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은 죽어야 할 자를 대신할 어린양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이해하려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따라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신과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우상을 만들어 파는 아버지와 함께 그 우상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아무 공로 없이, 아무 준비 없이, 그리고 40여 년의 시간을 함께 걸으시며 그를 다른 사람으로 빚어 가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도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은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보여 주십니다. 사람의 힘과 노력으로 만들어 낸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기다리다 지쳐 자신의 여종을 통해 낳은 아들, 그 인간적 해결책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만 탄생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사람들을 만들어 가십니까? 성경 창세기 15장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면서 짐승들을 쪼개어 마주 놓게 하셨습니다. 당시 두 사람이 언약을 맺을 때, 쪼갠 짐승 사이를 함께 지나가며 '내가 이 약속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될 것이다'라고 서약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아브라함은 깊은 잠에 빠졌고 하나님만이 홀로 그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맺어야 할 약속을 하나님이 홀로 지셨습니다. 약속이 깨지면 찢겨지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모리아 산의 이야기는 그 선언의 그림입니다. 죽어야 할 이삭 대신 양이 찢겨 죽었습니다. 죽어야 할 자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 죽습니다.
이 그림은 수천 년을 지나 예루살렘의 한 언덕에서 완성됩니다. 예수는 바로 그 모리아 산 자락, 예루살렘에서 어린양처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본 것은 그 죽음의 미리보기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죽어야 할 인간을 대신할 어린양, 이 말은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찢기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저 고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울 때 아내를 왕에게 넘기며 자신을 지키려 했고, 약속이 늦어지자 자신의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모리아 산 아침에 망설임 없이 길을 떠났습니다. 그 변화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실패하고 돌아오고, 의심하고 다시 붙잡고, 잃고 또 잃으면서, 그렇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몸으로 배운 세월이 그를 모리아 산에 세웠습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아마도 이런 것일 겁니다. 한 번의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긴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배우다가 마침내 손에 쥔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장로님의 목소리가 다시 떠오릅니다. 모든 것을 잃고도 어려운 이를 돕는 그분의 손이, 한 달 치 생활비로도 나눔을 멈추지 않는 그 결정이, 그것은 이를 악물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을 하나님과 함께 살아오면서, 잃고 또 잃으면서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온몸으로 배워 온 시간이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세계 행복지수 조사에서 최상위권에 꾸준히 오르는 나라 중에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바누아투가 있습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입니다. 기자들이 그 까닭을 취재하러 갔을 때, 그곳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단순했습니다. 욕심이 없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없는 대로, 배가 고프면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갯벌을 파서 게를 굽고 나무 열매로 배를 채웠습니다. 남은 것은 이웃과 나누었습니다.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삶의 왕좌에서 내려온 사람들의 표정이 저렇게 다른 것인가 싶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산을 오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아들을 바치러 가는 그 길을 그는 '경배'라고 불렀습니다. 예배라고 불렀습니다. 예배는 좋은 노래를 드리는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는 자기 삶의 주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내가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소중하게 붙들고 있는 것을 그분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를 지키려 하고, 자기가 쌓은 것을 지키려 하고, 자기의 방식대로 살려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그 긴 시간 끝에 그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면, 손에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배우다 갑니까? 손에 쥔 것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다 갑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법을 배우다 갑니다. 그 배움이 쌓여 마침내, 모든 것을 잃고도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사람이 됩니다. 모리아 산으로 아브라함을 이끈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산에서 죽어야 할 이삭 대신 어린양을 준비하신 것도 하나님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 그 준비는 우리의 성공이나 풍요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먼저 찢기신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 앞에 무릎 꿇는 것,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 예배를 배우다 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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