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니 청컨대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소유를 삼아 나로 내 죽은 자를 내어 장사하게 하시오"(창세기 23:4)
어떤 사람이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허리가 휘도록 일해서 논도 사고 밭도 샀습니다. 봄이면 씨를 뿌리고 가을이면 거두었습니다. 해마다 재산이 불어났고 마을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밭 가장자리, 땅이 끝나는 곳에 작은 무덤 하나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거기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니니 쓸모없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인이 되어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 사람은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덤이 결국 자신이 돌아갈 자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넓디넓은 밭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결국 한 평의 흙이었습니다.
창세기 23장에 등장하는 막벨라 굴도 바로 그런 자리에 있었습니다. 밭머리, 즉 밭의 끝자락에 있는 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굴을 사기 위해 은 400세겔이라는 거금을 치렀습니다. 당시 시세로 따지면 터무니없이 비싼 값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브라함은 그 굴을 샀을까요? 왜 거저 받을 수 있는 것을 굳이 비싼 값을 치르고 샀을까요? 그리고 왜 하필 그 먼 이국 땅 가나안의 밭 끝 굴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아브라함이 서 있던 자리로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천 년 뒤 시온 산에서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미리 그려놓은 그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손을 묶고 칼을 들었을 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린 채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산의 이름이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22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극적인 장면 뒤에, 뜬금없어 보이는 족보 하나가 조용히 삽입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자녀들 이름이 하나씩 열거되는데, 그 목록의 마지막에 브두엘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 뒤에 딱 한 마디가 덧붙여집니다.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다."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될 여인입니다. 왜 성경은 이 자리에 이 이름을 끼워 넣었을까요? 성경에 이유 없이 기록된 구절은 단 한 절도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사라가 곧 무대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그 자리를 이어갈 사람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끊기지 않습니다. 사라가 눈을 감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사사기 시대가 끝나가는 무렵, 혼란과 절망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이 한 여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과 같습니다. 모두가 '왕이 없으므로 각각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고 탄식하던 그 시절, 이방 여인 룻이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베들레헴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루트 끝에서 다윗이 태어납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하나님의 계획이 중단된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손을 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22장이 앞부분도 여호와 이레이고 뒷부분도 여호와 이레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라가 127세에 헤브론 땅 기럇아르바에서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소식을 듣고 아내가 누워 있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슬픔을 두 개의 서로 다른 단어로 기록합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다가"(창 23:2). 앞의 단어 '슬퍼하며'는 가슴을 치고 쥐어뜯으며 통곡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뒤따르는 '애통하다'는 전혀 다른 결의 단어입니다.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며 조용히 흘리는 눈물을 가리킵니다. 통곡하다가, 그 다음엔 담담하게, 이 두 단어는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두 가지가 동시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깊은 슬픔, 그리고 그 슬픔을 감당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 무언가가 바로 부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 그 상실의 무게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슬픔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것을 압니다. 같은 이별이라도, 영영 다시 볼 수 없다는 확신 속에서 하는 이별과 곧 다시 만날 것이라는 소망 안에서 하는 이별은 다릅니다. 공항에서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는 가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시 만날 날이 있기에 그 이별을 견딜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만남의 날이 없다면, 그 이별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미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드리러 갈 때,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 죽여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하나님을 그는 믿었습니다. 그 신앙이 지금 사라의 시신 앞에서 그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기록하는 아브라함의 다음 행동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창 23:3). 히브리 원문으로는 "사라의 얼굴 위에서 일어났다"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이 표현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 위에 엎드렸다가 일어남으로 아이가 살아났고(왕상 17:21~22),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의 눈에 자신의 눈을, 그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가 일어남으로 아이가 살아났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얼굴 위에 산 자의 얼굴이 포개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와 연합하여 그 사망을 가져가시고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복음의 그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몸짓으로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사라는 다시 살 것입니다. 바울은 훗날 이렇게 씁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 4:13). 성도의 죽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소망 없는 자의 통곡과 그 성격이 같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슬퍼하며'와 '애통하다'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 있었습니다. 사라를 고향 갈대아 우르에 묻는 것이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같은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이복 남매였습니다. 두 사람은 갈대아 우르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짐승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향한다고 했습니다. 코끼리는 죽음을 느끼면 자기가 태어난 곳을 향해 걷고,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고 합니다. 인간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망자는 고향에 묻히는 것이 고대의 불문율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는 가나안에 아내를 묻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례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사라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두 사람이 죽는다 해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와 자신은 이 땅에서 부활하여 그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의 본향을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히브리서는 이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3, 16).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단 한 채의 집도 짓지 않았습니다.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는 힘이 있었음에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으로 바란 것은 이 세상의 가나안이 아니라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하늘의 도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소유를 쌓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향해 나그네로 걷고 있었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그 걸음을 이어받았습니다. 야곱은 바로 왕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창 47:9). 다윗도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시 39:12).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 부르셨습니다. 나그네의 삶이 하나님 백성의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에게 매장지를 구했습니다. 에브론이라는 사람이 막벨라 굴을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거저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그 지역에서 아브라함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본문이 보여줍니다. 헷 족속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방백"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왕자요 장군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이 이방인을 통해 무언가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에브론이 거저 드리겠다는 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경의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절했습니다. 거저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제값을 내겠다고 했습니다. 에브론이 슬쩍 값을 불렀습니다. "은 400세겔이면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야 우리 사이에 문제가 되겠습니까." 시세보다 훨씬 비싼 값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금도 깎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달아서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값을 치른다는 것은 그것이 내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저 받은 것은 언제든 빼앗길 수 있습니다. 상대의 호의가 사라지면, 상대의 사정이 바뀌면 되돌려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값을 치른 것은 누가 뭐라 해도 내 소유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매장지가 온전히 자기 것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자기가 죽은 뒤에 누군가 자신의 시신을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없도록, 자기와 자기 후손들의 장지를 이 땅에 못 박아 두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선언이었습니다. 지금 눈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는 전혀 없습니다. 사라가 죽었고 자신도 늙었습니다. 이 땅의 한 조각도 아직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포기는커녕 자기의 재산을 털어 그 땅에 자신을 묻어버렸습니다. "나는 여기서 죽어도 이 약속을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그 굴에 묻혔습니다. 리브가도, 야곱도, 레아도 묻혔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눈을 감으면서 아들들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나를 애굽에 묻지 마라. 가나안 막벨라 굴에 묻어라."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400년 뒤 자기 유해가 가나안으로 돌아갈 것을 알았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약속을 받아두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때 모세는 요셉의 유해를 메고 나왔습니다(출 13:19). 400년이 지나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합니까?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이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약속의 땅이었다면, 오늘 우리에게 그 자리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상징하며 보여주는 곳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고, 교회 안에서 세상과 구별된 나그네의 삶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산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교회에 묻어야 합니다. 신앙의 여정 동안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교회 안에서 생을 마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값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 시세보다 비싸게 막벨라 굴을 산 것처럼, 우리도 교회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힘과 물질을 드려야 합니다.
다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당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성을 쌓지 않았습니다.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또한 그것은 소위 씨앗 헌금인, 집을 팔고 빚을 내서 드리면 열 배 백 배로 돌아온다는 그런 방식도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투기입니다.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일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흩어지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교회에 필요 이상의 돈이 몰리면 오히려 그 돈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역사는 수도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에 지불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의 힘으로 내 안위를 사는 삶을 살지 않겠다. 이 세상 것이 내 고향이 아님을 이 값으로 고백한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헌금이요, 봉사요, 구제요, 선교요, 예배입니다. 우리의 재물과 시간과 힘이 우리를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려지는 것이 막벨라 굴의 은 400세겔입니다. 2000년 동안 교회가 이어진 것은 이렇게 수많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세상 곳곳에서 자기의 막벨라 굴을 사왔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차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차가 그의 삶에 활력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두 다리를 잃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차도 탈 수 없게 됩니다. 두 다리 없는 사람에게 자동차는 아무런 효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 다리와 자동차를 바꾸겠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바보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바보짓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영혼은 뒷전에 두고 세상의 것을 얻는 데 온 힘을 쏟아붓는 것이 바로 두 다리와 자동차를 바꾸는 일입니다. 세상의 힘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돈과 명예와 인기로는 영원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밭이 무엇이든, 그 끝에는 막벨라 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굴 앞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을 외면하고 밭을 더 넓히는 데 남은 힘을 쏟아부을 것인가, 아니면 그 굴의 값을 치르고 영원을 향해 살 것인가?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은 400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라를 그 굴에 눕혔습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백이었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죽음 너머에 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소유를 털어 밭 끝에 있는 막벨라 굴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자가 이 땅에서 치러야 할 대가이며, 동시에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복된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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