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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모세의 놋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8. 7.

틴토레토, <모세의 놋뱀>, 1575~6, 이탈리아 베네치아 산 로코 스쿠올라 대회장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 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수기 21:5~8)

광야, 그곳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애굽에서 해방되었고, 이제는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곧장 가나안으로 이끄시지 않으셨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을 단순히 ‘
구출된 자’라는 이유로는 주실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해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결함과 훈련, 믿음과 순종,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죽음이 필요했습니다. 광야는 바로 그것을 위해 허락된 하나님의 거룩한 풀무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신비한 양식, ‘
만나’조차도 지겨워졌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 공급되는 생명의 떡을 싫증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하찮은 음식을 우리가 싫어하노라!” 이 외침은 단순한 식탁에 대한 불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공급을 멸시한 말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긴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죄는 무겁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셨습니다. 불평은 결국 불뱀을 부릅니다. 불뱀에게 물린 자들은 불같은 고통 속에 쓰러졌고, 광야는 죽음의 절규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깨달았습니다. “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모세)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나이다.” 비로소 죄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한 가지 이상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라.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 말씀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복음의 원형입니다. 죄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행위가 아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상처를 싸매고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장대 위에 들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이 살 길이었습니다.

틴토레토는 이 장면을 매우 상징적으로 그려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천사들의 격렬한 소동,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는 자들의 절망, 그리고 화면 왼편 높은 언덕 위에서 놋뱀을 들고 있는 모세의 형상, 이 그림은 인간의 비참과 하나님의 거룩, 죄의 심판과 구원의 방식이 한눈에 교차되는 복음의 장면입니다. 틴토레토가 묘사한 불뱀은 조금 특별합니다. 그 뱀은 물고기의 머리를 하고 있고, 몸통에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물고기는 고대 상징에서 ‘
치유’와 ‘생명’을 의미했습니다. 날개는 신속함과 영적인 속성을 암시합니다. 그 뱀은 단순한 벌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치유를 위해 택하신 초월적 방식을 나타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을 유혹했던 뱀, 느후스단(왕하 18:4) 그 악한 도구가, 지금은 하나님의 명령 아래 구원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신비를 마주합니다. 인간을 무너뜨렸던 상징이, 하나님에 의해 다시 들려 구원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십자가는 흉악한 형틀이며, 가장 저주받은 자가 달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들리셨을 때, 그 형틀은 생명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뱀은 죄의 상징이었고, 놋뱀은 죄의 형상입니다. 예수께서는 죄를 알지도 못하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뱀처럼 들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고후 5:21)

이 놀라운 역설은 인간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부수는 복음의 힘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무언가를 성취하여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낮아져 우리 가운데로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치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
쳐다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본 자는 살았고, 오늘 우리는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삽니다. 고개를 드십시오.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이 아니라, 십자가에 들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고통을 넘어서는 생명을 경험합니다. 상처가 치유되고, 영혼이 소생합니다. 광야는 끝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에게, 광야는 생명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틴토레토, <십자가에 메달린 그리스도, 1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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