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두 증거판이 그의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쪽 저쪽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 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 여호수아가 백성들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모세에게 말하되 진중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나이다 모세가 이르되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내가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하고 진에 가까이 이르러 그 송아지와 그 춤 추는 것들을 보고 크게 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리니라."(출애굽기 32:15~19)
출애굽기 31장 18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신의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의 두 판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이 돌판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며, 하나님 자신이 손으로 새기신 말씀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거룩한 말씀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산 아래에서 본 것은 경악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며 춤추고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고, 애굽의 우상 문화를 따라가며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 외치는 장면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패역한 반역이었습니다.
모세는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폭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자가 파멸을 향해 가는 것을 목도할 때 터져 나오는, 영혼을 찢는 슬픔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분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이런 분노와 이런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이 장면을 그리며 독특한 선택을 했습니다. 다른 화가들처럼 전투적이거나 위압적인 모세의 모습 대신, 그는 슬픔에 잠긴, 거의 울음을 삼키는 듯한 모세를 그려냈습니다. 불가타 성경의 영향으로 모세의 머리에 뿔을 그려 넣었지만, 그의 얼굴은 한없이 슬프고 처연합니다. 렘브란트의 모세는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인해 고통받는 선지자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금송아지를 찢어버릴 힘을 가진 자이지만, 무엇보다도 그 백성을 품고자 했던 아버지 같은 마음을 지닌 자로 그려졌습니다.
왜 렘브란트는 이런 모세를 그렸을까요? 그가 이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삶은 몰락의 끝자락에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명성은 사라졌고, 경제적 파산과 함께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 자식들의 죽음이라는 고난을 경험했습니다. 이 모든 고통을 겪는 동안 렘브란트는 인간의 죄와 허무,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애통함을 깊이 체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성경적 재현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회개와 연민, 그리고 하나님의 눈물을 향한 동경이었습니다.
렘브란트는 모세의 얼굴에 자신의 고백을 새겼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을 새겼습니다. 모세가 들고 있는 깨어진 돌판은, 깨진 언약이 아니라 깨져야만 했던 인간의 교만과 패역의 상징입니다. 그 돌판의 파편 앞에서 우는 모세는, 바로 하나님의 심정을 대언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하며 울부짖던 그 울음이, 렘브란트의 모세의 얼굴 위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애통의 하나님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그저 법적 심판이 아니라, 사랑이 거절당한 아픔이며, 배신당한 신랑의 통곡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며 춤추던 그 시간, 하나님의 마음은 찢기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손에서 돌판이 깨어질 때, 그것은 단지 화가 나서 돌을 던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의 죄 앞에 산산이 조각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림은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말 없는 눈물로 말합니다. 렘브란트의 모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돌판처럼 받아들고도, 여전히 네 안에 금송아지를 숨기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한없이 애절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우리를 정죄하시기보다, 깨진 언약을 다시 새 언약으로 세우시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얼굴은 모세의 얼굴처럼, 분노보다 슬픔이 가득하고, 정의보다 긍휼이 앞서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마 23:37)
이 울음은 모세의 울음이요, 렘브란트의 울음이요, 결국 하나님의 울음입니다. 그리고 이 울음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이 울음 앞에 어떻게 응답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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