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 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 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세기 45:3~8)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특별히 아꼈는데, 이로 인해 형들에게 시기를 받아 미움을 샀습니다. 질투심이 극에 달한 형들은, 어느 날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빠트렸습니다. 그리고 맏형 루우벤의 주도로 요셉을 지나가는 장사꾼들에게 노예로 팔고 아버지 야곱에게는 짐승에게 물려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우여곡절 끝에 바로왕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사가 되었습니다. 성실함으로 주인 보디발의 신임을 얻은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음에도 오히려 오해를 얻어 옥살이까지 하는 등 고난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하루는 바로왕이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몽할 수 있는 사람이 요셉 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요셉은 바로왕의 총애를 얻어 총리에 올랐습니다. 요셉은 7년 동안 이어진 풍년으로 곡식을 비축해 두었다가 온 세상에 기근이 들었을 때 이웃나라에 곡식을 팔아 애굽에 큰 부를 안겼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나라를 어질고 현명하게 다스려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습니다. 한편, 가나안에 살던 아버지 야곱과 요셉의 형제들은 기근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다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야곱과 형제들은 요셉과 극적으로 상봉했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을 용서하고 가족들을 모두 애굽으로 불러 고센땅에 정착하여 살게 했습니다.
화가 코르넬리우스는, 굶주림을 피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온 요셉의 형제들과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극적으로 상봉하는 장면을 3m에 이르는 거대한 프레스코 화면에 묘사해 사실감을 더했습니다. 동생을 노예로 팔아 넘겼던 형들은, 이웃나라의 총리가 바로 그 동생 인 요셉임을 알고 충격에 빠져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고 형들을 용서하며 끌어안습니다. 그림 속 요셉의 표정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은혜로움이 느껴집니다. 그림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인간의 모사 위에 하나님의 큰 계획과 섭리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고난을 만나든 행운을 만나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 믿고 교만하거나 괴로워하지 말아야 함을 우리는 왜 자꾸 잊고 사는 것일까요?
우리 인생에 때때로 찾아오는 뜻밖의 고난과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묻곤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요셉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이유도 모른 채 형들에게 팔려 타국의 종이 되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까지 갇혔습니다. 그러나 그 긴 터널의 끝에서 요셉은 전혀 다른 눈을 가지고 형제들을 바라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말은 단순한 용서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눈으로 고난을 재해석한 고백입니다. 요셉은 이제 자신이 당한 모든 불의와 수치가 사람의 악한 의도에 의해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뜻과 구원의 경륜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렌즈를 인간의 잘못이나 자기 불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두었습니다.
우리도 고난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왜’라는 질문으로 가득 찹니다. 그러나 요셉처럼 고난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 인생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단지 상처를 넘어서 은혜를 보게 됩니다. 요셉은 당한 대로 갚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대로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은혜가 있기에 형제들의 죄는 미움으로 갚아지지 않고, 용서로 덮여졌습니다.
신앙은 눈을 바꾸는 일입니다. 지금의 괴로움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지금의 억울함도 하나님의 계획 아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요셉은 단지 용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고난의 눈’ 대신 ‘하나님의 눈’으로 형제들을 본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을 되돌아볼 때, 그 안에 하나님의 숨결과 인도하심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면, 모든 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고난의 시간도, 눈물의 밤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 모든 실패도 결국 우리를 예비된 자리로 이끄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믿음으로 다시 눈을 들어야 합니다. 고난 너머를 보는 눈, 사람 너머를 보는 눈, 상처 너머 하나님의 손을 붙드는 눈, 요셉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해석의 중심에 둘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자유와 화해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고난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는 통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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