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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속으로

무엇이 참 신앙인가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6. 17.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 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 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누가복음16:19~31)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주는 두 인물의 대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속에는 인생과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 날마다 호화롭게 살던 부자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생명을 연명하던 거지 나사로 그리고 이 두 인물의 사후 운명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이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됩니다.
“무엇이 복된 삶인가? 그리고, 참된 신앙이란 무엇인가?”

고흐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벨기에의 한 탄광촌에서 7년간 선교사로 목회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에는 신앙의 빛보다 깊은 고뇌의 어둠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붕대를 감고 파이프를 문 자화상’, ‘담배를 문 해골’ 같은 작품은 그가 얼마나 깊은 내적 번민 속에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삶과 신앙, 현실과 이상, 진실과 위선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그의 흔적들입니다.

그가 그린 ‘
성경이 있는 정물’은 그 고뇌의 정수가 담긴 작품입니다. 성경은 펼쳐져 있고, 그 옆에 너무 많이 읽어 너덜너덜해진 소설책 한 권이 놓여 있습니다. 바로 에밀 졸라의 "나의 기쁨"이란 책입니다.

에밀 졸라는 무신론적 근대 소설의 선구자였습니다. 종교인의 위선과 형식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고,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는 진실을 향한 철저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습니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여준 그의 저항은 단지 한 문인의 정치적 참여가 아니라, “
정의와 양심”이라는 신념의 실천이었습니다.

고흐는 그런 졸라에게 매료되었고,
‘나의 기쁨’이라는 그의 소설은 단지 문학이 아니라 하나의 삶의 고백으로 고흐의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설은, 아이러니하게도, 성경 옆에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고흐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기독교를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형상화했습니다. 불 꺼진 촛불, 성경은 열려 있지만 그 빛은 꺼져 있습니다. 펼쳐진 성경은 이사야 53장,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종교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되었고, 참 신앙인은 핍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놓인 졸라의 소설은, 바로 그 고난받는 인생들의 소리 없는 외침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정립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기복신앙을 벗어나, 정의와 평화, 인간 존엄과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을 갈망하는 때입니다. 루터와 간디, 슈바이처처럼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곁에서 살을 태우는 삶을 바른 신앙인의 길이라고 확신하는 때입니다.

“그토록 성경을 사랑했고, 예수님의 삶을 좇고자 했던 고흐가 왜 결국 귀를 자르고, 광기에 시달리며, 자살로 삶을 마감해야 했을까?”

“에밀 졸라식의 신앙이, 고흐처럼 끝날 수도 있는가?” 정의와 사랑,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헌신이 왜 비극으로 귀결되는가? 왜 그런 이들이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무너지는가?

누가복음의 부자도, 이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색 옷을 입고 날마다 연회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은 뒤 음부에서 고통받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기만을 위한 인생을 살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는 무관심했습니다.

반면, 나사로는 이 땅에서는 고통받는 자였지만, 죽은 뒤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실패자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 끝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주십니다.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신앙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진리는 쇼가 아니라, 삶의 실천입니다.

고흐는 실패했을까요? 아니면, 인간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안고 그 끝자락까지 복음을 좇으려 했던 한 사람의 고뇌가 그의 인생을 덮었을 뿐일까요? 어쩌면, 고흐는 자신의 무너짐을 통해 우리가 더 깊이 참된 복음의 길을 묻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성공과 다르게 흐릅니다. 그 길은 외롭고 고통스럽고 때론 이해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흐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펼쳐져 있는 성경을 봅니다. 꺼진 촛불 아래에서도 성경은 여전히 이사야 53장을 열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의 구원은 결국 인간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진정 받은 자는 결코 무감각하게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의 아픔을 끌어안고, 그 속에서 자신을 태우며, 십자가의 흔적을 따라가는 삶이 복음의 삶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세상을 바꾸기 위한 사회 개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 삶 속에서 살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정의와 사랑과 은혜가 함께 머무는 길, 자기 의가 아닌, 예수의 의를 입고도 여전히 낮은 곳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좁은 길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만 정의와 공의, 사랑을 이루고자 했던 길과 하나님을 입에 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 종교적 체계를 통해 인간의 위선을 정당화하려 했던 길, 그 어느 쪽도 “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바로 이 두 극단을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겉보기엔 단순히 한 부자와 한 거지의 삶과 죽음을 대조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더 깊은 영적 진실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모든 좋은 것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린 ‘
좋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요, 진정한 생명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진 것들은 다만 일시적이고, 물질적이며, 자신만을 위한 호사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도, 성경 없이도, ‘잘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나사로는 가진 것도 없고, 건강하지도 않았으며, 개들이 헌데를 핥는 신세였습니다. 그러나 죽어서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깁니다. 이것은 단지 가난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붙잡고 살았던 자였음을 말해 줍니다. 그는 비록 이 땅에선 버림받은 자처럼 살았으나, 하늘에선 하나님의 위로를 입은 자입니다.

그런데 부자의 고백이 충격적입니다. 그는 죽어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혀가 서늘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형제들이 이 고통 받는 자리에 오지 않기를 원하지만, 그 역시 회개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동정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눅 16:31)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합니까? 복음은 기독교적 ‘
도덕성’이나 ‘인류애’를 뛰어넘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절대적인 무능과 절망,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서 나오는 삶은 단순한 윤리적 삶이나 사회 참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사는 삶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성경을 사랑했고, 예수를 따르고자 했으며,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붙든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성경과 예수님의 삶을 모범으로 보았을 뿐, 그 십자가가 자기의 죄를 위한 하나님의 대속이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복음의 능력까지는 붙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끝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고, 그 죄책감과 고통 속에서 파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참된 복음은 나의 고행이나 정의감이나 도덕적 투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내 이름을 부르시며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은혜 안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흐처럼 세상과 교회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결국 예수의 십자가 아래 무릎 꿇는 그 자리에서만 살아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예술과 윤리적 이상은 우리를 감동시킬 수 있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 곧 복음 안에서 살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도 믿지 않을 이 세대에,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