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 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 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 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마태복음12:38~42)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은 단순히 어떤 기적이나 표적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정도의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존재인가,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에 대한 신랄한 폭로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12:39)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이미 결심이 선 사람들입니다. 믿기 위한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자신들의 확신과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는 오늘날 신앙의 이름으로 기적을 요구하고, 성공을 요구하고, 축복을 거래하는 이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에릭 프롬이 말한 ‘존재 형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소유지향적 인간의 대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그 ‘존재’라는 것, 그 ‘성숙함’과 ‘착함’과 ‘헌신됨’이 과연 네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이냐? 그것조차 네가 소유한 것으로 삼고 있는 것 아니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엄숙주의를 정죄하셨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암기했고, 금식했고, 구제했고, 기도했고, 남보다 의로웠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존재의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오히려 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자기 영광을 높이며,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소유된 자기 의’였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니느웨는 요나의 설교에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즉 요나보다 더 크신 분이 오셔서 직접 복음을 전하셔도, 이 세대는 오히려 그분을 죽이려 합니다. 왜입니까? 그분이 원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의 개선’이 아니라, 존재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마12:40)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존재를 고상하게 만들자는 선언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존재는 완전히 죽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존재형 인간조차 십자가 앞에서는 죽어야 합니다.
본문 12장 43절 이하에 나오는 귀신 들린 사람의 비유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귀신이 떠난 사람의 마음이 깨끗이 정돈되고, 잘 수리되었는데 왜 더 많은 귀신이 들어오는 형편이 되었을까요?
성령이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룩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마음은 결국 또 다른 사탄의 놀이터가 됩니다. 도덕적인 삶, 깔끔한 양심, 헌신적인 존재, 다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없으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이 그 사람을 지배하지 않으면, 그 존재는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에릭 프롬은 존재냐 소유냐를 물었지만, 예수님은 훨씬 더 깊이 묻습니다.
"죽을래? 아니면 다시 태어날래?"
"네 존재, 네 소유, 네 의로움, 네 성숙함을 십자가에 못 박을래?"
"아니면 그걸 꼭 쥐고 더 많은 귀신들과 함께 멸망할래?"
복음은 우리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모든 선택의 주권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전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존재 지향적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길 원하십니다. 그 안에야말로 진짜 존재가 있고, 진짜 생명이 있고, 진짜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존재’를 가꾸는 자들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그것이 이 세대를 살릴 유일한 표적입니다. 요나의 표적, 곧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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