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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문 밖에서 두드리시는 주님 앞에 서다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1. 2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17, 20)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진 편지는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 서신의 마지막입니다. 이 마지막 편지는 결론이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영적 경고와 복음적 초대의 절정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놀랍게도, 우리 시대의 교회와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아니, 더 정직히 말하면 ‘
’의 이야기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먼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말씀하시되…” 여기서 “아멘”은 단순한 기도의 끝맺음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확실하다, 참되다, 반드시 이룬다”는 뜻입니다. 즉 주님은 언약을 반드시 완성하시는 하나님,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흔들립니다. 우리의 감정도 안정되지 못합니다. 어제 기뻤다가 오늘 무너지고, 오늘 믿음이 든든해도 내일 다시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언약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의 약속이 우리 영혼의 안전함과 부요함의 근거여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
언약’이 아닌 ‘상황’에서, ‘은혜’가 아닌 ‘성과’에서 안전감을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평안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고, 내 열심이 인정받으면 영적 부요함을 느끼지만,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불안해집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겉으로는 풍족했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텅 비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니…” 라오디게아의 실제 물 사정은 이 말씀을 더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온천수와 차가운 생수를 먼 거리에서 끌어오면 결국 미지근해져 토할 지경의 물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미지근함”을 들어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를 드러내십니다.

뜨겁다는 것은? 은혜에 붙잡힌 자의 자연스러운 열정, 하나님을 향한 생명력, 은혜가 흘러넘치는 기쁨를 말합니다. 차갑다는 것은? 여전히 구원은 아니지만 솔직한 상태, 스스로의 죄와 무능함을 직면한 정직함입니다. 그러나 미지근함은 무엇입니까? 은혜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중심, 열심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무기력, 부요한 듯하지만 실상은 비참, 신앙이 있으나 생명은 없음을 말합니다. 이 미지근함은 자기 진단이 불가능합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나는 영적으로 잘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
실상 너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도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넘어질 때가 아니라, 넘어졌는데도 모를 때입니다. 가난할 때가 아니라, 가난한 줄 모를 때입니다. 벌거벗었을 때가 아니라, 벌거벗었는데도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입니다.

주님은 그런 교회에 세 가지를 ‘
사라’고 하십니다. 첫째는 불로 연단된 금입니다. 그것은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 정결한 복음, 인간의 무언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의입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재산은 성취나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순전함입니다.

둘째는 흰옷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것, 내 행위의 옷이 아니라 주님이 덧입혀 주시는 의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련한 옷은 언제나 얼룩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흰옷은 죄의 수치를 가리는 은혜의 옷입니다.

셋째는 안약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눈을 뜨게 하는 성령의 조명, 나의 실상, 나의 죄, 나의 벌거벗음을 보게 하는 은혜입니다. 영혼의 눈이 떠지지 않으면, 복음도, 은혜도, 죄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자기 실상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책망과 징계는 버림받음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입니다. “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징계는 버림받음의 증거가 아니라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 인생에 책망과 징계가 찾아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가장 따뜻한 신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장 무섭게 하실 수 있는 일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것, 즉 무관심입니다. 그러므로 책망은 은혜입니다. 징계는 사랑의 형태입니다.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안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표지입니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이 구절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불신자 전도용 문구가 아니라, 이미 “교회”라고 불리는 공동체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 교회 ‘’이 아니라 교회 ‘’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십니다.

문 밖의 주님… 예배는 드려지는데 주님은 밖에 계십니다. 기도는 많은데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습니다. 활동은 많은데 생명은 없습니다. 그분은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다만 ‘
두드리실’ 뿐입니다. 그리고 ‘기다리실’ 뿐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
이기는 자에게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리라.”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무너진 교회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벌거벗고, 가장 미지근한 자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기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보좌에 앉히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고, 은혜로부터 시작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늘 우리의 거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더 미지근하고, 생각보다 더 가난하며, 생각보다 더 눈멀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정죄가 아니라 초대입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조차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십니다. 보좌에 앉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나는 무엇에서 안전감을 느끼고 있는가? 나는 혹시 은혜 대신 성취와 열심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지금 나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가? 나는 그 음성을 들을 귀가 있는가?"

오늘도 주님은 문 밖에서 사랑을 품고 기다리십니다. 그 문을 열면, 주님은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교제하시고, 우리 영혼을 다시 뜨겁게 하실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의 부요가 되기를, 그분의 언약이 우리의 안전함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