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요한계시록 3:1~3)
사데 교회의 문제는 간단합니다. 겉으로는 살아 있는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죽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사데 교회를 통해 “교회시대 전체”를 향한 일종의 안내문을 보내셨습니다. 어떤 교회와 성도는 ‘살아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죽어 있을 수 있다는 경고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기억하고(므네모뉴오), 지키고(테레오), 회개하고(메타노에오), 깨어 있으라(그레고류오). 이 네 가지를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생명이 아닌 껍데기가 되어 버립니다.
죽은 믿음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리 속에는 존재하지만 일상의 사고와 판단 속에는 없는 신앙입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하루만 더 살려달라”, “더 좋은 약 없느냐”고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습 자체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순간 부활과 영생의 믿음이 하나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영원을 믿고, 천국을 믿는다면서 죽음의 순간 하나님이 아니라 의학·기술·환경·자기 힘만 붙드는 모습은 사실 사데 교회의 영적 상태와 똑같은 것입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외친 말은 단순한 철학적 선언이 아닙니다. “신은 죽었다”는 외침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원하던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신의 명령이 귀찮고, 신의 통치가 부담스럽고, 신 앞에서 책임지고 살기 싫어하던 인간에게 니체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신은 죽었다. 너희는 스스로를 초월하라. 가치는 너희 내면의 의지가 결정한다.”
인간들은 너무 기뻤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으니까요. 죄인이 기다리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 신학자들까지도 “신은 죽었다 신학”을 만들며 하나님의 죽음을 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세계관은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지옥을 낳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파괴합니다.
풍요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성경은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경고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 8:12~14) 풍요는 언제나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부자는 건강 문제로, 건강한 자는 경제 문제로, 지혜로운 자는 훈련교관을 보내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은혜의 간섭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어떤 결핍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벌이 아니라 사랑의 보살핌입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금방 사데 교회처럼 죽어버립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이미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가 사두개인입니다. 모세오경만 인정하고 천사, 내세, 부활을 부정하고 제사장 계급이었으나 현세적 권력과 부를 붙들고 살던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 가서 부활을 조롱하는 질문을 합니다(막 12:18~27).
예수님의 답은 단호했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막 12:24) 죽은 믿음의 정체는 이것입니다.
죽은 믿음은 성경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신앙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성경은 읽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신앙, 교리에 익숙하지만 하나님의 능력과 영원을 기대하지 않는 신앙, 예배는 드리지만 부활을 실제로 믿지 않는 신앙, 종교 활동은 많지만 하나님이 없는 삶, 이 모든 것이 사데 교회의 죽은 믿음이며 사두개인의 죽은 신앙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예수님은 해결책을 네 단어로 주셨습니다.
첫째, 기억하라. (므네모뉴오) 복음을 계속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매일 기억하십시오. 망각은 죽음의 첫 단계입니다.
둘째, 지키라.(테레오) 기억한 복음을 실제 삶에서 지켜내십시오. 지식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셋째, 회개하라.(메타노에오) 회개는 감정이 아닌 방향 전환입니다. 죽은 습관, 죽은 신앙, 죽은 우상을 끊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십시오.
넷째, 깨어 있으라.(그레고류오) 종말적 긴장감으로 살아가십시오. 오늘 예수께서 오실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죽은 신앙은 적당히 믿어도 성립됩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신앙은 늘 깨어 있어야만 유지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오늘 이 질문을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내 신앙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죽어 있으나 스스로 살아 있다고 착각하는가?” 주님 앞에 섰을 때 “너는 산 자다”라는 음성을 듣는가, 아니면 “너는 죽은 자다”라는 심판을 듣는가.
살아있는 믿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잊지 않고,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며, 부활과 영원을 실제로 붙잡고, 늘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한 걸음 돌아서도록 주님은 오늘도 부르십니다. “기억하고, 지키고, 회개하고, 깨어 있으라.” 이것이 죽은 믿음에서 살아 있는 믿음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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