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요한계시록 2:20)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믿음, 섬김과 인내로 칭찬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겉모습만 본다면, 누구보다도 헌신적인 성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단 한 가지 치명적인 책망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세벨은 아합 왕 시대의 실존 인물이지만, 요한계시록의 이세벨은 단순히 한 여인이 아니라 거짓된 신앙 체계와 세속적 욕망의 상징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실제로는 ‘자기 배를 섬기는 종교’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이용하는 신앙, 이것이 이세벨의 영입니다.
사도 바울은 “저희의 신은 배요”(빌 3:19)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유익을 위한 거래입니다. 예배는 복을 얻기 위한 투자이고,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며, 봉사는 하나님께 점수를 따기 위한 행위가 됩니다.
그런 신앙 안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인격적인 주인이 아니라, “내가 원할 때 불러 쓰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이세벨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께 절대 의존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문명을 만들고 종교를 세웠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의 후손들은 성(城)을 세우고, 음악과 금속 기술을 발전시킵니다. 겉보기에는 찬란한 문명이지만, 그것은 하나님 부재의 증거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스스로 신이 되어야 했고, 스스로 자신의 안전과 풍요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을 모방한 종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은 자연재해나 죽음처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다스릴 신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신화 속의 신들은 모두 인간의 욕망을 닮았습니다. 풍요의 신, 전쟁의 신, 사랑의 신, 성공의 신…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도 그런 신들이 다른 이름으로 존재합니다. 기도하면 뭐든지 해결해주는 ‘문제 해결사 하나님’, 복만 주는 ‘축복의 하나님’, 건강과 성공만을 보장하는 ‘비전의 하나님’ 그러나 이런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인간이 만들어낸, “예수의 이름을 빌린 금송아지”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이스라엘은 불과 40일 전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고 맹세했지만, 모세가 산에 올라가자마자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만든 것은 금송아지, 즉 이집트의 풍요의 신 ‘아피스’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한 여호와라”(출 32:4)고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기괴한 모순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분의 본질을 완전히 왜곡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분을 우리의 욕망에 맞게 재해석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축복해 주시고, 내 길을 평탄하게 하시는 하나님’, ‘내 사업을 번창케 하시는 하나님’ 그런 신앙은 여전히 금송아지 앞에서 춤추던 이스라엘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 중 하나는 ‘시간을 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더디 오자 그들은 불안을 느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앞에 보이는 형상을 더 신뢰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분’을 신뢰하는 일인데, 사람은 보이는 세계에 안착하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그분을 내 통제 안에 두려는 욕망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 숭배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이루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은 은혜의 방편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너희가 내 소유가 되며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라.” 즉,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열방이 하나님을 알게 하려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목적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통로”가 아니라 “복을 받는 수단”으로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그 결과, 종교는 자기 욕망을 합리화하는 체계로 변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신앙이 같은 길을 걷습니다. “예수 믿으면 잘된다.", “기도하면 성공한다”, “헌금하면 복을 받는다.” 이런 말은 겉으로 보기엔 신앙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조르고 달래면 내 욕망을 이루어주는 신”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세벨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분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분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내 뜻을 이루기 위한 이름표로 그분을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의 여정은 목적지(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입니다. 길 위에서 주어지는 공급은 목적이 아니라 여정을 가능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마라톤을 뛰는 선수가 보급소의 음료수에 만족하며 멈춰버린다면 그는 결승점에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결승점으로 가는 보급품일 뿐입니다. 그 복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나이키 대신 나이카를 주셔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기쁨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의 가르침은 여전히 교회 안에 살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욕망을 합리화하는 신앙이며, 복음의 이름으로 자기를 높이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복을 받기 위해 예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복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예배합니다. 그의 신앙은 거래가 아니라 사랑이며, 그의 예배는 요구가 아니라 경배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요한계시록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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