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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이세벨의 영, 오늘의 교회 속으로

by HappyPeople IN JESUS 2025. 10. 17.

“그러나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요한계시록 2:20)

두아디라 교회 안에는
“이세벨의 가르침”이 퍼져 있었습니다. 이세벨은 구약의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 안으로 들여온 여인입니다. 그녀의 이름 자체가 “바알과 함께”라는 뜻을 가진 엣바알의 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함께’ 대신 ‘바알과 함께’를 외친 자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거짓 신앙의 뿌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교회 안의
‘이세벨’“자칭 선지자”라고 하십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 하나님은 자기 욕망을 들어주는 신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예배는 회개가 아닌 흥분이었고, 그녀의 기도는 순종이 아닌 거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예배가 바로 그러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배당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 나에게 축복을 주세요!” “이 문제 해결해 주세요!” 하며 외칠 때,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빠져 있다면 그 기도는 이미 이세벨의 제단 위에 올려진 제물입니다.

엘리야 시대의 바알 제사장들이 드러낸 네 가지 행위가 그대로 두아디라 교회에, 그리고 오늘의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들의 제사는 축제였습니다.
“즐거워야 예배야!” “지루하면 안 돼!" 그래서 예배는 콘서트가 되었고, 말씀은 공연의 한 코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나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 앞에 무너지는 시간입니다. 눈물이 아니라 회개가, 감동이 아니라 순종이, 흥분이 아니라 경외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환갑잔치 같은 예배”를 원치 않으십니다. 정작 주인공이신 하나님은 문밖에 계시고, 사람들이 서로 즐기는 예배라면 그것은 바알의 축제일 뿐입니다.

두 번째는 큰 소리로 그들의 신을 부르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 큰 기도”가 아니라 조바심과 불안으로 드리는 종교 행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듣고 계신가?” “응답 안 하시면 어쩌지?” 그 불안은 믿음이 아니라 의심이며, 기도의 외침은 간절함이 아니라 공포의 소리가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외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짜 기도는, 이미 내 안에 계신 그분께 순종하며 침묵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자해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새벽마다 기도하는데!” “이렇게 밥 굶고 금식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주시겠어?" 이건 믿음이 아닙니다. 협박입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했으니 들어줘야 한다”는 계산은 십자가의 은혜를 값싼 거래로 바꾸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미 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생을 보시고 마음이 움직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기 고행으로 감동시키려는 신앙은 ‘
은혜’가 아니라 자기 의(義)입니다.

네 번째는 진언, 즉 미친 듯한 예언입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진언을 외쳤습니다. 끊임없이 외치며, 자기 안에서 “
”을 끌어올리는 종교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신의 뜻을 묻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열정으로 신을 조종하려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며 성경 밖의 계시를 주장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완성된 말씀 속에 있습니다. 그 말씀을 깨닫고, 삶으로 순종하는 것이 성경적 예언입니다.

왜 이런 신앙이 교회에 침투했는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복음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에서 밀려나면 그 자리를 인간의 열심과 감정과 종교적 행위가 차지합니다.
‘더 열심히’, ‘더 간절히’, ‘더 크게’, ‘더 오래’ 하려는 신앙은 생명의 복음이 아니라 죽은 종교의 열심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예배는 무엇인가? 엘리야의 제단은 달랐습니다.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수축했습니다(왕상 18:30). 그는 열두 개의 돌,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상징하는 돌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 위에 제물을 올리고, 그 위에 물을 붓고,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 불은 사람의 열정에서 오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불을 내리셨습니다. 참된 예배는 인간의 감정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불, 즉 성령의 임재와 은혜의 역사로 시작됩니다.

“네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이세벨이라는 여자를 용납하고 있다.” (계 2:20) 주님은 오늘 우리 교회에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세벨을 용납하고 있구나. 내 이름으로 포장된 이교적 신앙을 교회 안에 두고 있구나." 예배가 흥분으로 바뀌고, 기도가 거래가 되고, 헌신이 자기 의로 바뀌었을 때, 주님은 교회를 향해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지 아니한 너희 남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겠다."(계 2:24) 이세벨의 교훈을 거부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깊은 흉계’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말씀을 사랑했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세상의 풍조에 섞이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약속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 내가 그에게 샛별을 주겠다.”(계 2:26~28) 샛별, 곧 그리스도 자신이 상급입니다. 참된 성도의 상급은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다만 내가 올 때까지, 너희가 가지고 있는 그것을 굳게 붙잡고 있어라.”(계 2:25) 세상은 점점 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예배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붙잡은 자, 즉, 복음 하나로 만족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는 바알의 축제입니까, 아니면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우는 엘리야의 제단입니까? 이세벨의 가르침을 끊어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붙드는 교회, 그 교회가 바로 두아디라의 남은 자이며, 샛별의 영광을 받게 될 신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