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즉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요한계시록 2:16)
요한계시록 2장 12~17절의 버가모 교회 편지는 겉으로는 든든해 보이지만 속은 무너져 가는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 편지는 단지 고대 도시 버가모의 문제만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외형적 성공과 내적 타락이 공존할 때 나타나는 보편적 병리를 오늘 우리에게도 비춰 줍니다.
버가모는 로마 제국 속에서 황제 숭배와 수많은 우상 신전이 모여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교회는 외부의 핍박을 견뎌냈고, 순교자 안디바 같은 충성된 증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먼저 중요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좌우에 날선 칼을 가진 이”(계 2:12). 이 표상은 예수님의 권위와 말씀의 심판성을 드러냅니다. 결국 생사와 심판의 권세는 세상의 권력에게 있지 않고, 말씀을 가진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안디바 같은 충성된 증인을 기억하시고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 안에는 발람의 가르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십니다(계 2:14~15).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이 아니라 신앙의 타협과 왜곡입니다. 발람의 가르침은 돈과 이익 혹은 세상의 유익을 위해 진리를 팔아넘기는 꾀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제사와 음란으로 백성을 넘어뜨렸고, 오늘날에는 복음이 성공의 도구로 전용될 때 비슷한 형태로 드러납니다.
니골라당의 가르침은 잘못된 자유관, 즉 ‘나는 이미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무율법주의입니다. 경건과 삶이 분리되고, 교회에서의 의례와 삶의 현장이 일치하지 않는 영적 분단을 낳습니다.
본문은 우상을 단지 옛 시대의 목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섬기지만, 다른 것으로 존재의 만족과 행복을 구하는 태도”가 바로 우상입니다. 현대의 우상은 성공·명예·재물·욕망·쾌락·권력·나의 이미지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크고 목사가 유명해지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면, 복음은 도구로 전락합니다.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와 싸우리라”(계 2:16). 여기서 싸움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말씀의 심판(좌우의 날선 검)입니다. 말씀으로 드러나지 않은 허물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회개는 단순한 후회의 감정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 전환이며, 구체적 행동의 변화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 외에 만족을 주는 대상을 찾아 이름 붙이고 내려놓아야(고백) 합니다. 그리고 개인과 교회의 생활 영역에서 경건과 윤리가 일치하도록 실천해야 합니다. (예: 경제, 성, 시간 관리, 대인관계). 또한, 교회 지도자와 성도의 교훈이 성경과 일치하는지 분별하고, 잘못된 가르침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권면하고 책임지는 영적 친교를 해야 합니다.(작은 그룹, 제자훈련).
회개하고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인 만나와 흰 돌(새 이름)이 약속됩니다(계 2:17). 만나와 흰 돌은 단순한 보상적 대상이 아닙니다. 감추인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세상의 부요함으로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배고픔을 예수님으로 채우는 삶을 의미합니다. 흰 돌과 새 이름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식별과 정체성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그 이름을 아시며, 그 안에서 성도로서의 참된 신분과 소속을 누리게 됩니다. 이 약속들은 ‘장차 주어질 것’이면서도 동시에 ‘지금 누리는 현실’입니다. 이미 예수 안에서 우리의 이름은 새로워졌고, 그분의 잔치에 참여한 자로서 만나를 먹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의 크기나 외형적 성공이 복음의 지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승리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끝까지 충성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안락과 명예를 좇는 대신, 매일 주의 말씀으로 자신을 재정비하고, 작은 자리에서 충성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임을 버가모의 경고는 가르칩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등장하는 버가모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을 잘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 다시 말해 우상숭배와 거짓 신앙이 가득한 도시 한가운데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안디바와 같은 신실한 증인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예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버가모 교회 성도들의 용기와 충성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내면 깊숙한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겉으로는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고, 니골라당의 거짓 가르침을 용납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즉, 세상의 가치와 타협하면서도 스스로 신앙을 잘 지키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허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하고, 결국 복음을 흐리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너무도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문화와 가치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지 못한 채 오히려 세상의 방식을 따라간다면, 겉으로는 “믿음을 지켰다”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주님 앞에서는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버가모 교회에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속히 가서 입의 검으로 너와 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입의 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결국 교회는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얼마나 순결한가로 평가됩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계속 타협한다면, 그 말씀의 날카로운 검은 우리를 찌르는 심판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 그리고 새 이름이 새겨진 돌을 허락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만나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하나님의 은혜였다면, 감추어진 만나 역시 오직 주님께 속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흰 돌은 무죄 선언과 승리의 표징이었고, 그 위에 새겨진 이름은 하나님과 성도의 친밀한 관계, 세상이 알지 못하는 은밀한 복을 나타냅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세상과의 타협 속에서 편안함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좁고 힘든 길이라도 주님을 붙들며 말씀대로 걸어갈 것인가. 버가모 교회는 두 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타협을 허용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타협을 묵과하지 않으시고, 회개와 결단을 촉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교회 안에 있지만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고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의 이름을 붙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상 속에서 ‘믿음 없는 삶’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음성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회개하라, 그리고 말씀의 검으로 돌아오라.” 말씀을 따라 사는 길이 좁고 때로는 손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 끝에는 감추어진 만나와 흰 돌, 그리고 새 이름을 주시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겉으로는 믿음을 지켰지만 속으로는 세상과 타협한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회개로 부르시고, 이기는 자에게 영원한 상급을 약속하십니다. 오늘 우리도 그 경고를 귀담아 듣고, 오직 말씀만이 우리의 기준이 되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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