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우리는 종종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를 오해합니다. 흔히 그것은 입에 거품을 물고, 방언을 말하며, 몸을 떨고 쓰러지는 어떤 신비로운 경험이라 생각합니다. 또는 사람들의 앞날을 예언하거나 특별한 은사를 드러내는 모습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던진 이 단호한 명령,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은 그러한 표면적인 현상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 실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명령’입니다. "받으라"는 말은 명령형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 충만은 우리가 선택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반드시 실행하라고 하신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지 않으십니다. 성령 충만은 거룩한 초청임과 동시에 반드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책임을 회피하거나, '특별한 부류의 사람만 받는 것'이라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 명령은 복수형입니다. 이는 일부 목회자나 은사자, 열정적인 신자들만이 대상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평신도, 사역자, 노인, 청년,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 충만은 선택이 아니라 정체성입니다.
성령 충만은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충만하게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그 충만을 사모하고, 마음을 열고,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실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 준비된 자에게 성령을 부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자리는 먼저 회개와 자기를 비우는 자리입니다.
성령 충만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지속적인 동작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단지 한 번만 충만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지속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고 추구하라는 뜻입니다. ‘한때’의 충만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마치 컵에 채운 물이 시간이 지나면 마르고 흘러내리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께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육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성령 충만은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에서 분명해집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가장 생생한 증언입니다. 특히 고넬료의 집에 임한 성령 사건은 중요한 전환점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미 경건한 자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와 구제를 실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방식대로, ‘제사의 향기’처럼 그의 행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에게 '다시' 임하십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이제 더 이상 ‘그림자 같은 율법의 기대’가 아니라,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부터 구원은 단지 메시아를 ‘기대’하는 믿음이 아니라, 그 분을 ‘만난’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고넬료 사건의 앞뒤에는 이상하게도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사건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애니아의 치유, 다비다의 부활,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 살리신 야이로의 딸, 수넴 여인의 아들의 이야기까지…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들'입니다.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성령의 강림은 죽었던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일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상징입니다. 성령 충만은 단순히 “내가 충전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적 체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 부활 생명에 참여하는 깊은 영적 연합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곧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사랑, 온유, 인내, 자비, 절제, 충성, 양선… 그분의 인격이 내 삶에 드러나는 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착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내가 느끼는 감정의 고조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날마다 나 자신을 낮추고, 광야 같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나를 순종시키는 훈련의 연속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배운 교훈은 단순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란, 세상의 힘이나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을 생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왜 성령 충만한 자는 광야로 내몰리는가?
예수님도 세례 받으신 직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광야는 버려진 땅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단둘이 있는 공간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내 힘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배우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를 살린다는 진리를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곧, 광야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외롭고 고통스럽고, 때론 이해받지 못하는 삶. 그러나 그곳에서만 우리는 참된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은 연습입니다. 성령 충만은 한순간의 열정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권투선수가 본능적으로 공격을 피하듯, 반복된 훈련 속에서 성령의 인도에 민감해지는 습관의 결과물입니다. 내 행동이 감정을 이끌고, 그 반복된 행동이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빚어갑니다.
마귀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여 육으로 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동으로 성령의 사람됨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힘든 이를 위해 기도하고, 참고, 용서하고, 인내하는 그 모든 과정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거룩한 삶입니다. 그것은 신비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붙들며,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려 애쓰는 모든 삶의 태도입니다. 고넬료처럼, 다비다처럼, 야이로의 딸처럼, 우리도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깨어나십시오. 방황하지 마십시오. 자기중심적 신앙을 버리십시오. 세상적 힘과 성공을 신앙의 증표로 여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거룩을 좇아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진짜 ‘생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다비다야, 일어나라.” “달리다쿰.” 성령께서 지금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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