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태복음 25:31~34)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이틀 전, 가장 절박한 시점에서 들려주신 마지막 비유가 있습니다. 바로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흔히 “선한 일을 많이 하여 양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 정도로 가볍게 다뤄지지만, 이 말씀은 종말의 심판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복음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1)
예수님은 ‘인자’로 자신을 부르시며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을 직접 인용하십니다. 인자는 고난을 통과한 존재입니다.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분, 바로 그분이 최후의 날 심판주로 오십니다. 즉, 이 심판은 도덕적 재판이나 행위의 저울질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한 통치, 곧 복음에 대한 반응에 기초한 왕의 선언입니다.
들판에서는 양과 염소가 함께 있지만, 밤이 되어 우리에 들일 때는 반드시 구분합니다. 외적으로 섞여 지내도, 본질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양은 원래부터 양이며, 염소는 처음부터 염소였다는 데 있습니다. 양이 선한 일을 해서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양은 양이기에 주인을 알았고, 주인의 뜻을 행한 것입니다.
한편 염소는 착한 일을 덜 해서 염소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임금이 누구인지, 그가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고, 결국 복음 안에 거하지 않은 자들이었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 구절은 단순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윤리적 돌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작은 자’는 본질적으로 고난과 멸시, 배고픔과 병듦, 수치와 연약함을 친히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는 죄의 모든 증상을 자신의 육체에 짊어지셨습니다. 그는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병들고, 갇히신 자이셨습니다.
복음은 작은 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눈을 갖게 합니다. 양들은 그 ‘작은 자’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따로 기억하지 않아도 주님을 영접했기에, 주님의 고난에 연합되었기에, 그 작은 자를 외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염소들은 그 작은 자를 몰랐습니다. 아니,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엔 그리스도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자, 주님의 임재에 들어간 자에게만 주어지는 영적 시력입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놓입니다. 헬라어로 오른편은 덱시오스, 이는 ‘영접하다’라는 뜻의 데코마이에서 온 단어입니다. 곧, 오른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리입니다. 이들이 양인 이유는 선행의 결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주인으로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왼편’은 유오뉘모스, ‘유’(좋은)와 ‘오노마’(이름, 명예)의 합성어로, 자기 이름과 명예를 위하여 살았던 자들을 뜻합니다. 주님을 떠나 자기 공로, 자기 의, 자기 영광으로 살아온 자들입니다. 결국, 주를 떠난 자는 그 자체로 저주를 받는 자입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곳, 그것이 곧 지옥입니다.
이 비유가 정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 되었는가?” 양과 염소의 차이는 도덕성과 선행의 차이가 아닙니다. 진정한 구분은 십자가의 예수와 하나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입니다.
양은 작은 자이신 예수님과 동일시 되었습니다. 염소는 작은 자를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예수님과 아무 연합이 없었습니다. 심판은 우리 행위의 양이나 도덕적 무게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우리가 십자가의 주님과 하나 되었는가, 이것이 최종 심판의 기준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장래에 있을 심판에 대한 예고가 아닙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매일같이 구분되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을 작은 자로 영접하고 있는가? 나는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생명과 연합하고 있는가? 나는 이름을 나타내려는 염소인가, 이름을 잊고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양인가?
이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 엎드리게 만듭니다. 양이 되기 위한 노력이 아닌, 우리가 염소일 수밖에 없는 자였음을 자백하고, 다만 주님의 은혜로 나 같은 자를 양 삼아 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알고, 십자가로 사는 사람만이 양입니다. 양은 “내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염소는 “제가 왜 그걸 안 했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차이는 행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내가 염소였음을 압니다. 그런 나를 오른편에 두시고, 당신의 나라를 상속하게 하신 주의 은혜로 인해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며 삽니다. 지극히 작은 자로 오신 주님을 알아보게 하시고, 그분을 나의 왕으로, 구주로, 주인으로 믿게 하소서.”
아들에게 입 맞추십시오. 그분만이 생명입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마 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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