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7)
세상은 종종 긍휼을 하나의 인격적 미덕이나 윤리적 행동으로 여깁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눈물을 닦아주는 행동들을 ‘긍휼’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긍휼은 단순한 도덕적 동정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먼저 입은 자만이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자신의 무력함을 자각한 자의 절절한 고백에서 비롯됩니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긍휼을 베푸는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그 긍휼이 이미 하나님께 받은 긍휼임을 전제로 말씀하십니다. 인간 안에는 선이 없고, 스스로 선을 이룰 능력도 없습니다. 로마서 3장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긍휼히 여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입니다. 긍휼은 인간의 도덕성에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성령의 열매입니다.
긍휼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엘레오스" 인데, 이는 단순히 불쌍히 여긴다는 뜻을 넘어, 고통에 대한 감정 이입과 그 고통을 함께 짊어지려는 마음까지 포함합니다. 긍휼은 현실을 직시하며, 타인의 슬픔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함께 애통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자비와 은혜가 있고, 자기 자리를 낮추는 겸손이 있으며, 사랑의 희생이 깃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을 때 “불쌍히 여기사” 울며 다가가셨던 것처럼, 긍휼은 이웃의 절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책입니다. 음란한 여인 고멜을 끝없이 사랑하는 호세아의 모습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긍휼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죄악에 빠져 자기를 거절하고 우상을 좇는 백성들에게도 “너는 내 백성이라” 말씀하시며, 긍휼을 끊지 않으십니다. 긍휼은 값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본질이며, 자격 없는 자에게 임하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 긍휼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 존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자들은 모두 자신이 무능력한 자임을 고백한 자들입니다. 나병환자, 혈루병 여인, 맹인, 귀신 들린 자, 심지어 백부장이나 수로보니게 여인까지 그들은 공통적으로 “주여,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안 자들이었습니다. 긍휼을 구할 수 있는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무력함의 인정 없이는 진정한 믿음도, 긍휼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사마리아인은 율법사가 생각하던 ‘이웃’의 개념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이 비유는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닙니다. 인간은 본래 강도 만난 자입니다.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으며, 아무도 자기 힘으로 자기 영혼을 살릴 수 없습니다. 율법도, 제사도, 사람도 그를 도울 수 없습니다. 참된 사마리아인, 곧 예수님만이 그를 긍휼히 여기며 기름과 포도주로 치료하십니다. 우리는 긍휼을 베푸는 자이기 전에, 먼저 긍휼을 입은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사는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그가 누구에게 긍휼을 베풀었느냐가 아니라, 그 자신이 긍휼을 입을 자임을 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긍휼은 율법의 외적 행위가 아닌, 내면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수 없습니다. 긍휼은 율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자비이며,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잠 12:10) 인간의 긍휼은 종종 조건적이며, 자기만족적이며,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긍휼은 죄인을 품되, 그 죄를 짓밟고 사망에서 끌어올리는 생명의 긍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긍휼의 결정체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그분의 사랑이야말로, 죄인인 우리에게 부어진 가장 위대한 긍휼입니다.
야고보는 경고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긍휼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내가 설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입술과 삶에서 흘러나와, 타인을 정죄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그런 자는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긍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인간의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그가 긍휼을 베푸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은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면, 그것은 내가 더 착하거나 선해서가 아닙니다. 나는 여전히 무력한 자이며,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단 한순간도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은 곧 ‘우리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긍휼이 우리를 통해 흘러가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가 긍휼을 흘려보낼 수 있도록, 먼저 긍휼로 우리를 붙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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