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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민수기 - 두 번째 유월절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18.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다 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민수기 9:10~11)

사막 한가운데서 기념일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텐트 앞에 쪼그려 앉아 모래바람을 막으며, 1년 전 그날을 떠올리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들이 기억하는 것은 눈물과 서두름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발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쥔 채로 밥을 먹었습니다. 문틀에는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급히 먹느냐고 물었고, 어른들은 대답했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떠난다." 그리고 실제로 떠났습니다.

그 출발로부터 꼭 일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 그들은 시내 광야 한복판에 있습니다. 앞에는 아직 가야 할 광야가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유월절을 지키라." 이스라엘 백성은 명령대로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기록한 두 번째 유월절입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다룬 어느 기록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총탄이 빗발치는 해변에서 한 병사가 동료에게 외쳤습니다.
"너 어느 편이야?" 동료는 대답 대신 군복 깃을 벌려 계급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상대가 아군임을 확인하는 방법은 단순했습니다. 무엇을 입고 있느냐, 무슨 표식을 달고 있느냐, 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표가 생사를 가렸습니다.

유월절의 밤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 온 땅을 지날 때, 그가 본 것은 사람의 됨됨이가 아니었습니다. 문설주에 발린 피였습니다. 피가 있으면 지나갔고, 피가 없으면 멈추었습니다. 거기에 사는 사람이 히브리인인지 애굽인인지, 선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오직 피였습니다.

이것은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놀라운 자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의 자격을 기준으로 삼으셨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는
'당신은 이 피를 신뢰하느냐'는 질문을 담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피를 바른 집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피를 바르지 않으면 죽었습니다.

유월절 규례 가운데 이상하게 보이는 조항이 하나 있습니다. 어린 양의 뼈를 꺾지 말라는 것입니다(민 9:12). 왜 뼈를 꺾지 말아야 합니까. 당시 문화에서 뼈가 꺾인다는 것은 완전한 죽음, 곧 더 이상 회복이 없는 상태를 의미했습니다(사 38:13; 렘 50:17).

그런데 이 작은 규례는 수천 년 뒤 한 처형 현장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 양편의 강도는 숨이 붙어 있어 군사들이 뼈를 꺾어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이르러서는 이미 운명하셨으므로 뼈를 꺾지 않았습니다(요 19:36).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처럼, 뼈가 꺾이지 않은 채 죽으셨습니다.

시편 기자가 고통 중에 울부짖었습니다.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시 51:8). 꺾어진 뼈가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대신 꺾이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뼈가 꺾여야 했는데, 그분이 대신 꺾이셨습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내가 삽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처음부터 이것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유월절을 준비하던 중에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시체를 다루다가 부정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분명했습니다. 부정한 자는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규정을 알면서도 모세 앞에 나아와 물었습니다.
"우리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보십시오. 이들은 불평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억울하다고 항의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유월절에서 빠지는 것이 너무 아쉬워서 온 것입니다. 자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혹시 길이 있을까 하여 나아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봅니다. 오랜 죄의 기억을 안고 교회 문 앞에 서서
'나 같은 사람이 들어가도 되는 걸까' 하고 망설이는 사람, 오랫동안 신앙에서 멀어져 살다가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오고 싶지만 자신이 너무 부정하다고 느끼는 사람, 그들이 묻습니다. 우리에게도 길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길이 있다." 한 달을 기다려서라도 유월절을 지키게 하십시오. 먼 여행 중에 있어도, 시체로 부정하게 되었어도, 둘째 달 열넷째 날에 지키면 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반면 부정하지도 않고 여행 중도 아니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집니다(민 9:13). 하나님은 참여를 원하는 자를 막지 않으시고, 참여를 마다하는 자를 내버려 두십니다.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열두 명 가운데 열 명이 보고했습니다.
"땅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땅의 사람들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습니다. 못 들어갑니다." 백성은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른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것이 왜 단순한 겁쟁이들의 실수가 아니라 반역입니까. 그들이 부정한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부정한 것은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그 피가 애굽의 죽음에서 건져냈다면, 그 피의 능력은 가나안의 강적 앞에서도 유효합니다. 유월절은
'한 번 건져주셨으니 이제 끝'이 아니라 '그 피의 능력으로 오늘도 살아간다'는 선언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은 것, 그것이 반역의 본질이었습니다.

결과는 혹독했습니다. 그 믿음을 저버린 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죽어야 했습니다(민14:32~35). 사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 기간 동안 유월절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희생 제사도 없었습니다(암 5:25). 광야는 무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십 년을 단순히 심판으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매일 아침 만나가 내렸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음식이 하늘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신 8:3).

빵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고, 배를 채웁니다. 말씀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당장 배를 채우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빵이 아니라 말씀이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이스라엘은 그것을 배웠습니다. 혹은 배우지 못한 자들은 광야에 묻혔고, 그것을 지켜본 새 세대가 비로소 뼈에 새겼습니다.

사십 년이 지나고 요단강 앞에 섰습니다. 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할례였습니다. 광야 사십 년 동안 할례를 받지 못한 새 세대 모두가 길갈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수 5:10). 세 번째 유월절이었습니다.

이튿날부터 그 땅의 소산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만나는 멈추었습니다. 더 이상 하늘에서 음식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이스라엘 역사는 유월절을 잊어가는 역사였습니다. 사사 시대에 유월절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왕국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이 다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유다 왕국 말기, 요시야 왕 때입니다.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던 중에 제사장 힐기야가 율법 책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잊혀 있던 두루마리였을 것입니다. 그것을 읽는 서기관 사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요시야 왕은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어겼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그 충격에서 시작된 개혁은 유월절의 회복으로 정점에 달했습니다. 역대하는 기록합니다.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다"(대하 35:18). 그러나 한 왕의 개혁은 누적된 역사를 되돌리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불탔습니다.

이방 땅에서 포로로 사는 동안, 그들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렸는지를 말입니다. 안식일도, 안식년도, 유월절도, 땅의 경제 질서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의 방식을 스스로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불충실로 파기되지 않았습니다. 칠십 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다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무렵, 이스라엘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시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문 하나하나를 세밀하게 해석하고 지키는 것을 신앙의 척도로 삼았습니다. 유월절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유월절마다 수십만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어린 양을 사고 팔고, 규례대로 잡고, 규례대로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유월절 규례를 철저히 지키던 그 시간에, 유월절 어린 양 자신이 도성 바깥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역설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기억하는 의식을 지키는 자들이 정작 어린 양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더 큰 역설은 그 죽음 자체가 모든 율법의 완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율법의 수백 가지 조문이 가리키는 곳은 결국 하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그 사랑의 완성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자기를 죽인 자들을 위해 죽는 것, 그것이 그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전날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수백 년간 지켜온 그 의식을 따라 상이 차려지고, 어린 양이 준비되고, 무교병이 놓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떡을 드셨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시고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그리고 잔을 드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9~20).

제자들은 그 말씀의 무게를 그 자리에서 다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 후 사흘 만에 살아나시고, 성령이 오신 뒤에야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 만찬이 마지막 유월절이었다는 것과 수천 년간 어린 양의 피로 드려진 그 모든 유월절이 가리키던 실체가 바로 그날 밤 그 식탁에 앉아 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과 함께 의식으로서의 유월절, 절기로서의 유월절은 끝났습니다. 실체가 왔으므로 그림자는 역할을 다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한 문제를 다루다가 뜻밖의 말을 꺼냅니다. 교회 안에 음행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묵인하고 있었고, 심지어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이미 희생되셨다"(고전 5:7).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더 이상 특정한 날에 어린 양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그 믿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음행과 악의와 자랑이라는 묵은 누룩을 버리고,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사는 것, 그것이 새 언약의 유월절인 것입니다.

보리 농사를 짓는 농부를 생각해 보십시오. 가을걷이를 마치고 이듬해 봄 파종을 준비하면서 그는 씨앗을 고릅니다. 썩거나 상한 씨앗은 버립니다. 아무리 아까워도 상한 것을 심으면 밭 전체를 망친다는 것을 그는 압니다. 누룩 없는 삶이란 이런 것입니다. 무엇이 내 안에서 부풀어 오르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것이 상한 것이라면 아까워도 버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특징 하나를 말합니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이다"(히 11장). 아브라함은 평생 장막에 살았습니다. 이삭도, 야곱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땅을 밟으면서도 거기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유월절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한 것도 믿음으로 한 것이었습니다(히 11:28). 눈에 보이는 것에 근거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피를 발랐습니다. 그 믿음이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이었습니다.

첫 유월절에 이스라엘은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쥐고 급히 먹었습니다. 여기가 집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떠나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도 그 정신을 이어갑니다. 이 땅에 완전히 정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허리에 띠를 매고 지팡이를 쥔 채 살아 가는 나그네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광야 한복판에서 지킨 두 번째 유월절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왔는지는 압니다. 무엇으로 사는지도 압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압니다. 그 세 가지를 알기에 광야 한복판에서도 어린 양의 피를 기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 광야 한복판 어딘가에 있습니다. 이미 출발했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 어디쯤에 있습니다.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는 그분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가 광야 한복판에서 날마다 드리는 유월절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