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민수기 9:23)
사막을 걸어본 사람은 낮의 열기가 얼마나 혹독한지, 그리고 밤이 되면 그 열기가 얼마나 빠르게 사라지는지를 압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었던 시나이 광야는 낮 기온이 40도를 훌쩍 넘고, 밤이면 10도 이하로 떨어지는 극단의 땅이었습니다. 그 황량한 땅 한가운데, 방금 완성된 성막 위로 구름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자 그 구름은 불빛으로 물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수백만 명이 그 빛을 바라보며 잠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단순히 날씨의 도움이나 자연현상으로 읽는다면, 우리는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면 이스라엘은 진을 쳤습니다. 구름이 떠오르면 짐을 쌌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오아시스 근처에 천막을 치고 겨우 이틀을 살았는데, 구름이 움직입니다. 아이들은 이제 막 이웃 아이들과 친해졌고, 나이 든 어르신들은 겨우 허리를 펴고 앉았는데, 다시 짐을 꾸려야 합니다.
반대로, 모래바람이 불고 물도 귀한 메마른 땅에 머물게 되었는데, 구름은 한 달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원망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이런 순간은 낯설지 않습니다. 평생 일군 사업을 접어야 할 때, 익숙한 도시를 떠나 낯선 곳으로 이주해야 할 때, 반대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상황에서 꼼짝없이 머물러야 할 때, 그 자리가 하나님이 머물라 하시는 곳임을 납득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민수기는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였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쳤으며." 이 단순한 문장 안에 수백만 명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성막이 완성되기 훨씬 전부터 이스라엘과 함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은 이스라엘이 애굽을 막 빠져나왔을 때, 성막도 언약궤도 아직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미 구름기둥 불기둥이 그들 앞에서 인도하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요? 유월절 밤, 문설주에 발린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성막이 완성되는 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막의 가장 깊은 곳, 지성소의 속죄소에는 반드시 피가 뿌려져야 했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단 한 번, 그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피 없이는 그 자리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피와 구름, 피와 불,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있는 곳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 계신다는 진리를 구약의 역사 전체가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의 장면은 극적입니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의 기병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닉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열 가지 재앙을 두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세에게 소리쳤습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종으로 사는 게 낫겠소!"
인간의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제의 기적도 오늘의 공포 앞에서는 순식간에 잊힙니다. 우리도 크고 작은 하나님의 은혜를 수없이 경험하면서도, 새로운 위기 앞에서는 또다시 무너지지 않습니까. 그때 모세가 한 말은 단 하나였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이것은 무기력한 체념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의 싸움을 눈으로 보라는 선포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가, 그리고 구름기둥이 이스라엘 진 앞에서 그 뒤로 이동해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애굽 진에는 흑암이, 이스라엘 진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두 진영은 서로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모세는 지팡이를 들었고 홍해는 갈라졌습니다. 구름기둥은 날씨 장치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방식이었습니다.
수백 년 후, 선지자 요엘은 장차 올 날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실 것이며, 그 날에 하늘과 땅에 이적이 베풀어질 것인데,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언을 처음 들었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아마도 광야에서의 구름기둥과 불기둥,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올 어떤 위대한 날에 그것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 예언이 성취된 날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땅에서는 피가 흘렀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는, 불과 연기기둥이 함께 있었습니다. 성부와 성령이 성자의 십자가 사건에 함께하셨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함께 이루신 일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는 군중 앞에 서서 요엘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사렛 예수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려" 물었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이 질문이 나오는 순간이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름이 없고 불기둥도 없는 이 시대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는 것일까요?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그는 특별한 신비 체험도, 기적의 표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오직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러나 그는 그 경험보다 "더 확실한 예언", 즉 기록된 성경 말씀이 있다고 했습니다. 직접 보고 들은 체험보다 말씀이 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우리는 종종 뚜렷한 꿈이나 환상이나 특별한 감동같은 신호를 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 같은 예언의 말씀을 날이 새어 샛별이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어느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수십 년간 오지에서 사역한 그는 은퇴 후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특별하게 들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 이 길이 맞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게 전부였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가리키던 것은 여전히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피 흘리심 안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하셨고, 그 진리를 기록한 말씀이 오늘도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스라엘이 구름을 바라보며 멈추고 또 떠났듯, 우리는 말씀을 통해 머물 때와 나아갈 때를 분별합니다. 구름이 한 달을 머물러도 이스라엘이 기다렸듯, 우리도 말씀 앞에서 때로는 기다림을 배웁니다. 구름이 밤사이 떠올라 예상치 못한 새벽에 이동을 시작했듯, 우리의 삶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여정 가운데, 어린 양의 피 아래 있는 자들을 성부와 성령이 떠나지 않으십니다.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위에 구름기둥이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펼치는 것이, 구름을 올려다보는 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