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등불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할지니라 하시매, 아론이 그리하여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이 등잔대의 제작법은 이러하니 곧 금을 쳐서 만든 것인데 밑판에서 그 꽃까지 쳐서 만든 것이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보이신 양식을 따라 이 등잔대를 만들었더라."(민수기 8:1~4)
성막에는 창문이 없었습니다. 햇빛이 스며들 틈도, 달빛이 비칠 틈도 없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가면 한낮에도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소 안에 등잔대를 세우게 하셨고, 그 등불을 항상 꺼지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굳이 등불이 필요했을까?” 그러나 이 질문 속에는 이미 인간의 오만이 숨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어둠을 없애지 못해 임시방편을 마련하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막의 어둠은 실수도, 결핍도 아니라 의도였습니다. 그 어둠은 인간의 상태를 보여주는 거울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첫 장면은 빛이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 깊은 흑암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빛이 있으라.” 이 빛은 태양이 아닙니다. 넷째 날에야 태양이 만들어집니다. 이 빛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질서의 빛, 생명의 빛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은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빛이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불어넣어질 때 비로소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졌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지만 그 밝아짐은 빛이 아니라 더 깊은 어둠이었습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한밤중에 손전등 하나 없이 산길을 걷다가,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눈앞은 조금 밝아진 것 같지만, 그 빛 때문에 오히려 별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방향을 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더 쉽게 길을 잃습니다. 타락 이후 인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빛 대신 자기 판단의 불빛을 켰습니다. 그리고 그 불빛을 ‘눈이 밝아짐’이라고 부릅니다.
성소 안의 등잔대는 아무 데나 비추지 않았습니다. 그 불빛은 떡상, 곧 진설병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떡상 위에는 열두 개의 떡이 놓였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징합니다. 이 장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은 항상 내 빛 앞에서 살아야 한다.” 사람은 스스로를 비추며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 기준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삶은 반드시 왜곡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 “나는 양심껏 살았어.” “적어도 저 사람보다는 낫지.” 하지만 성소 안에 들어가면 이런 말은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창이 없고, 오직 등불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빛 앞에서는 비교도, 변명도 무의미합니다. 오직 드러남만 있을 뿐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말은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숨으시는가?” “왜 이렇게 찾기 어려운가?” 그러나 하나님이 숨어 계시지 않다면, 인간은 반드시 자기 방식으로 하나님을 소유하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은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 계시되, 등불은 꺼지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복음의 구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알게 하십니다. 인간은 빛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은 인간을 찾아옵니다. 사무엘 시대, 나라가 엉망이었을 때도 성소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지만, 하나님의 등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희망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신앙이 무너질수록, 하나님의 등불은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은 어느 순간부터 놀라운 표현을 쓰기 시작합니다. 다윗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다윗 자신은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즉, 다윗은 비추는 자이기 전에 비추임을 받는 자였습니다. 자기 안에 빛이 없음을 아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등불은 한 사람 안에 완전히 담깁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이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몸이 됩니다. 휘장은 찢어지고, 등불은 더 이상 꺼질 수 없는 빛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잔인하지만 정직합니다. 복음은 항상 인간의 자존심을 무너뜨립니다. 진짜 맹인은 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본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가장 많이 알았고, 율법을 가장 잘 지켰으며, 자기들이 빛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빛을 거부했습니다. 반면, 자신이 어둠임을 아는 사람들, 죄인임을 고백한 사람들, 무너진 사람들에게 빛은 실제가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이제는 성소도 필요 없습니다. 해도, 달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막의 등불은 사람이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등불은 사람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타오릅니다.
등불은 어둠이 있다는 전제 위에 켜집니다. 자신이 어둠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빛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하는 순간, 빛은 이미 비추고 있습니다. “주여, 나는 보지 못합니다.” “주여, 나는 어둠입니다.” 그 고백이 바로 성소 안에서 처음 켜지는 등불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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