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출애굽기 1:15~22)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원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출애굽’이 아닙니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이름들이 이러하니라.” 이 말은 단순한 명단의 나열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마지막에서 육의 야곱은 죽고, 그의 아들들은 더 이상 혈통의 이름이 아니라 언약 안에서 불린 이름들, 곧 이스라엘의 이름이 됩니다. 다시 말해 출애굽은 장소 이동의 사건이 아니라, 이름의 이동, 정체성의 이동입니다. 죄와 죽음에 매여 있던 육의 이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으로 옮겨지는 사건이 출애굽인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은 아이러니로 시작합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 그 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었습니다. 언약은 멈춘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에는 약 200년 이상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계시의 말씀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했을까요?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해져서 온 땅에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말없이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적과 표적, 눈에 보이는 변화로만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을 따라 일하십니다. 언약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분은 결코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왕은 히브리 산파들에게 명령합니다.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라.” 여기서 “산파”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얄라드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출산을 돕는 기술자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낳다, 생기게 하다, 산고를 겪다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 말입니다. 창세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던 톨레도트(계보, 낳음)는 바로 이 단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산파는 단순한 직업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역사 속에서 이어지도록 서 있는 존재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성경이 이들을 “히브리 산파”라고 부른다는 점입니다. ‘히브리’란 ‘건너온 자’라는 뜻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언약으로 건너온 자들입니다. 이 산파들의 용기가 위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위해 죽음을 건너온 자들로 그들을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산파들의 이름은 십브라와 부아입니다. 십브라는 ‘아름다움’, 부아는 ‘빛남, 뛰어남’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둘을 “사람”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히브리어로는 ‘첫째(에하드)’와 ‘둘째(셰니)’로 표현힓니다. “십브라라 하는 첫째와 부아라 하는 둘째.”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처음 낳는 아름다움이, 두 번째 낳음에서 빛나고 뛰어나게 됩니다. 아들을 낳는 역사, 곧 톨레도트의 주체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을 ‘내가 얼마나 잘 낳아내는가’, ‘내가 얼마나 잘 살아내는가’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낳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돌들 위를 살펴서’ 바로 왕의 명령 속에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 자리를 살펴서.” 이 표현 속에는 히브리어 오벤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쌍수 명사로, ‘두 개의 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토기장이의 녹로, 바퀴, 산파의 출산 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단어를 통해 토기장이의 집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았습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는 이 ‘오벤’을 보며 남자와 여자를 구분합니다. 씨 있는 자는 죽이고, 씨 없는 자는 살려 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파는 다르게 봅니다. 그들은 이 자리에서 살려야 할 아들, 곧 자신을 살리는 아들을 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첫 아담은 생령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산파들은 아들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 아들이 곧 자기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 말은 단순한 윤리적 결단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방향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생명이 어디에서 오며, 역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왕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건너온 자에게 왕의 위협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씨 있는 자, 곧 진리를 낳는 복음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 모습은 종종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발견됩니다. 복음을 말하지만 십자가는 불편해하고, 은혜를 말하지만 자기 부인은 회피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우리를 자기 이름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졌습니다. 여기서 ‘은혜를 베푸시니’라는 말은 야타브입니다. 선하게 하다, 잘 놓다, 기뻐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들을 언약 안에 제대로 위치시키셨다는 의미입니다. 복이란 무엇입니까? 언약 안에서 제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겉보기에는 반복되는 일상일 수 있습니다. 기적도 없고, 특별한 사건도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그 죽음에 동참하게 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산파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십니다. 이때 사용된 ‘아사’는 ‘이루다,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집을 잘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아들을 살리는 일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집을 세우십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그 이름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집에 합류되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그 십자가 앞에서 살아 있다면, 하나님은 결코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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