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이라.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니 그의 맏아들은 느바욧이요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라 이들은 이스마엘의 자손들이라. 아브라함의 소실 그두라가 낳은 자손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요 욕산의 자손은 스바와 드단이요. 미디안의 자손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이들은 모두 그두라의 자손들이라."(역대상 1:28~33)
성경을 읽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이름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자세히 적어 놓은 걸까?” 역대상 1장은 특히 그렇습니다. 아담에서 시작해 노아, 셈,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족보로써 익숙한 이름 몇 개를 지나면 금세 낯선 이름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우리에게 이 족보는 마치 의미 없는 명단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족보는 결코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를 기록한 가족 앨범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한 무대 장치입니다.
한 편의 영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공만으로는 영화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길을 지나가는 행인, 배경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 잠깐 등장했다 사라지는 엑스트라들까지 있어야 이야기가 살아납니다. 성경의 족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노아, 아브라함은 주연급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인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 서사를 완성하기 위한 존재들입니다. 특히 성경은 ‘괜찮은 사람들’만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 타락한 자,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이름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남겨 둡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죄가 없다면 십자가는 필요 없고, 저주가 없다면 구원은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은 망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보여 주고, 그 망한 자들을 위해 오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모든 이야기를 밀어붙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과 여러 서자들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이스마엘은 ‘실패작’처럼 취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스마엘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열두 지도자를 낳게 하셨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눈에 보이는 번성과 힘을 허락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이스마엘의 인생은 꽤 성공적입니다. 자녀 많고, 영향력 있고, 세력도 큽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형통한 삶’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생깁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저게 복이구나.”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되는 거구나.” 그래서 많은 신앙이 이스마엘식 복을 좇습니다. 기도하면 일이 잘 풀리고, 헌금하면 장사가 잘되고, 교회 다니면 인생이 안정되는 것입니다. 티가 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냉정합니다. 이스마엘은 분명 복을 받았지만, 약속의 노선에는 있지 않습니다. 그의 번성은 ‘구원의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반 은총으로 허락하신 세상적 복일 뿐입니다. 반대로 이삭은 어떻습니까? 아들 하나 낳기까지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고, 그 하나뿐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까지 받습니다. 눈에 띄는 성공도, 화려한 업적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너무 조용하고, 너무 초라합니다. 이게 바로 티 나는 복과 티 나지 않는 복의 차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혼란을 단번에 정리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한 분, 그리스도다.” 이 말은 굉장히 불편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 왠지 우리가 그 계보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단호합니다. 혈통도, 노력도, 경건도 기준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 안에서만 자손이 됩니다.
여기서 복의 정의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진짜 복은 잘되는 인생이 아닙니다. 진짜 복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이 깨지는 것입니다. 진짜 복은 내가 사실은 저주 아래 있는 죽은 자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살리기 위해 먼저 실패하게 하십니다. 자기 의가 무너지고, 신앙의 계산이 깨지고, “이렇게 살면 잘 될 거야”라는 공식이 통하지 않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예수가 필요해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형통은 세상과 다릅니다. 성경적 형통은 “내 인생이 잘 풀린다”가 아니라, “예수를 얻었다”입니다. 일이 안 풀려도 예수가 있으면 복입니다. 실패해도 예수가 남아 있으면 은혜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죽고 그분이 사신다면 그것이 형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를 만나는 것이 유일한 축복이다." 세상적인 기적은 눈에 띕니다. 병이 낫고, 문제가 해결되고, 상황이 바뀝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된 기적은 다릅니다. 세상적 형통이 없어도 티 나지 않는 복, 예수 그리스도를 복으로 알고 감사하며 소망하는 사람이 진짜 기적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의 길은 높아지는 길이 아닙니다. 낮아지는 길이고, 죽는 길이며,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마침내 한 분을 만납니다.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족보의 완성이고, 우리의 유일한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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