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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역대상 - 조상들이요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3.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아브람 곧 아브라함은 조상들이요."(역대상 1:24~27)

사람은 자신의 조상을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떤 집안인지,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로 자신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습니다.
“너는 어느 족보에 속해 있느냐?”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하지만 정직하게 돌아보면, 이 고백은 삶에서 붙들고 사는 진실이라기보다 머릿속에 저장된 종교 상식에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정작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지 않고 사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굽힐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아멘”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안에 없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위기가 오면 하나님을 찾지만, 평안할 때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네가 예수를 주라 고백한 것은 네가 잘해서가 아니다.” 그 고백은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으키신 사건인 것입니다.

역대상 1장을 읽다 보면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셈의 족보가 마치 두 번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욕단으로 이어집니다. 이 족보는 화려합니다. 민족이 번성하고, 땅이 넓어지고, 이름이 남습니다. 그러나 이 흐름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습니다.

다른 한쪽은 아브라함으로 이어집니다. 이 족보는 느리고, 불안정하고, 때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비효율적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욕단의 족보가 훨씬 성공적입니다. 숫자도 많고, 영향력도 큽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언약 없는 번성은 여전히 저주 아래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건강한 몸, 넘치는 재산, 그러나 그 인생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 삶은 여전히 욕단의 족보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브라함의 길은 어떠했습니까. 고향을 떠나야 했고, 자식 하나 얻는 데 수십 년을 기다려야 했고, 마침내는 그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까지 받았습니다.

이 족보는 인간의 가능성으로는 이어질 수 없는 족보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면 끊어질 수밖에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혈통의 족보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새 족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계산합니다.
“이만큼 기도했으니 이 정도 복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이 정도 헌신했으니 하나님이 좀 도와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아브라함의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태도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모욕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고,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셔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잘되었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의가 있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우리를 실패의 자리로, 무너짐의 자리로, 빈손의 자리로 데려가십니다. 거기서야 비로소 우리는 깨닫습니다.
“아, 나는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성도는 스스로를 이렇게 정의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원래 저주의 그릇이었다.” 이 고백이 없는 신앙은 결국 자기의 의를 붙드는 종교로 변질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 선 사람은 다릅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저주 아래 있던 나를 예수님이 자신의 피로 옮겨 놓으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감사하면서도, 늘 떨립니다.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붙들 것이 오직 십자가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입니다.

성도의 삶이 편안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족보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오해받고, 손해 보고, 때로는 고난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삶이 하늘의 족보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공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자기 열심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가지를 증거합니다.
“예수의 피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 고백이 바로 이 족보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역대상의 족보는 지루한 명단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오늘 우리의 삶을 향한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너는 지금 어느 족보 위에 서 있는가?” 욕단의 번성인가, 아브라함의 십자가인가, 행위의 족보인가, 은혜의 족보인가, 이 질문 앞에 설 때, 복음은 더 이상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오늘 나를 살리는 하나님의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