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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레위기 - 소의 번제와 완성된 예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3.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 위에 불을 붙이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위기 1:3~9)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예배를 잘 드려야 한다.” “정성껏 준비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이 말들 자체가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전제는 매우 위험합니다. 예배를 인간의 의무, 태도, 정성, 혹은 성취의 문제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복음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장에 기록된 소의 번제는, 인간의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무너뜨리며, 오직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사만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제사 제도가 오늘날의 예배로 그대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무엇’으로 이해합니다. 마치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섭섭해하시고, 예배의 완성도에 따라 하나님의 만족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0장은 이 생각을 근본부터 뒤집습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구약의 제사는 반복되어야 했고, 결코 죄를 온전히 없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표지판이었습니다. 그 표지판이 가리킨 곳은 오직 하나, 십자가였습니다.

예를 들어, 긴 공사 구간에서
‘우회도로’라는 표지판을 따라 한참을 달렸는데,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도 여전히 표지판만 붙들고 있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지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단번에 제사를 완성하셨는데도, 여전히 인간의 정성과 행위를 예배의 중심에 두려 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후퇴일 뿐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는 범죄 후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종교성을 보여줍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언제나
‘무엇이라도 해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 합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기도, 봉사, 헌신, 예배 출석으로 스스로를 덮으려 합니다.
“이 정도 했으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무화과 잎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치마를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십니다. 가죽옷은 반드시 피 흘림을 전제합니다. 누군가 대신 죽어야만 가능한 옷입니다. 이 장면은 이미 복음의 원형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행위의 옷을 벗기시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히시는 것입니다.

마치 진흙탕에 빠진 아이가 스스로 옷을 털며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아이의 그 행동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이를 씻기고, 새 옷을 입힙니다. 그 옷은 아이가 준비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준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자주 오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아벨이 더 정성스럽게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정성이 아니라
‘피’였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왔습니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져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그 믿음은 무엇을 향한 믿음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덮으시는 방식은 피 흘림이라는 계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려서 얻어내는 거래가 아닙니다. 제사는 인간이 아무것도 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제사의 중심은 언제나 제물이었지, 제사장이 아니었고, 드리는 자의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내가 얼마나 잘 준비했는가’를 증명하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레위기 1장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형편에 따라 제물을 다르게 허락하십니다. 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양이나 염소를 드리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이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를 드립니다.

인간의 눈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소를 드리면 대단해 보이고, 새를 드리면 초라해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큰 헌금을 하는 사람, 눈에 띄는 봉사를 하는 사람은 존중받고, 조용히 예배만 드리는 사람은 쉽게 잊힙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 모든 제물이 동일하게
‘불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인간의 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드렸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기로 정하신 유일한 제물이 무엇이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앞에서는 등급이 없습니다. 소를 드릴 수 있었던 부자도, 새 한 마리밖에 드릴 수 없었던 가난한 자도 동일하게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평등성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인간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남들보다 조금 낫다.” “너는 이것이라도 했지 않느냐.” 이 사고방식은 곧 예배를 비교하게 만들고, 신앙을 성취의 문제로 바꿉니다.

그러나 소의 번제가 가르치는 복음은 분명합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부정당하고, 오직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만이 인정받습니다. 성도의 유일한 역할은 더 나은 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제사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주의 피로 의롭다 하신 그 은혜.” 이것이 예배의 전부이며, 이것이 성도가 평생 붙들어야 할 유일한 자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