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 머리는 순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 같이 검구나.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우유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생김새는 레바논 같으며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아가 5:9~16)
부부가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봅시다. 그 어떤 부부도 “우리의 사랑은 완전하다”고 말하지는 못합니다. 결혼 초에는 작은 말 한마디에도 설레다가, 시간이 지나면 같은 말이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분명 사랑해서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섭섭함이 쌓이고, 이해받지 못한다는 감정이 고개를 듭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느라 지친 아내가 남편에게 “오늘 좀 힘들었어”라고 말했는데, 남편은 무심코 “나도 회사에서 죽는 줄 알았어”라고 답합니다. 남편 입장에서는 공감의 표현이었을지 모르지만, 아내의 마음에는 ‘내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구나’라는 섭섭함이 남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요? 사랑이 식어서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상대가 ‘내 기대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기준으로 관계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실망하고, 실망은 곧 분노나 냉담함으로 변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한쪽이라도 완전한 사랑을 하면 됩니다. 상대가 서툴게 행동해도, 이해받지 못해도, 끝까지 품어 주는 사랑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랑을 지속적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잠깐은 가능해도, 결국은 지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완전한 사랑은 하늘로부터 온 사랑뿐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 속한 자를 성경은 ‘신부’라고 부릅니다. “네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아가서 5장 9절에서 여인의 친구들이 묻습니다. “여자들 가운데에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은 사실상 이렇게 들립니다. “그 남자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아서 저렇게까지 하는 거야?”
앞선 이야기에서 여인은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것처럼 헤매다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내 사랑하는 이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전해 달라.”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그 남자가 도대체 뭐가 다른데?” 이제 우리는 여인의 대답을 기대합니다. "잘생겼다, 능력이 있다, 왕이다, 부자다, 나를 잘 챙겨준다…" 그러나 여인의 대답은 전혀 예상과 다릅니다.
여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하는 이를 묘사합니다. 그런데 그 표현들이 이상합니다. “머리는 순금 같고,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고,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다리는 순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이걸 읽으면서 실제로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나요? 솔직히 말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상이 막혀 버립니다.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여인의 자랑은 보여 주기 위한 설명이 아닙니다. 이해시키기 위한 언어도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비교하는 것을 아예 거부하는 자랑입니다. 왜냐하면 여인은 세상의 안목으로 사랑하는 이를 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가서 4장에서 남자가 여자를 묘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눈은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이 말도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여자’의 묘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그 안목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세상의 기준이 아닌,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것이 바로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 된 성도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의 안목으로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깨끗해서, 쓸모 있어서 신부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너는 거룩하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신부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보며 말합니다. “별 볼 일 없는 인생”, “부족투성이 인간”, “실패와 상처로 얼룩진 존재”.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안목으로 우리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다.” 이 사랑을 입은 성도는 이제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같은 안목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을 잘 풀어주는 분, 내 외모와 형편을 업그레이드해 주는 분, 세상에서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분으로만 바라본다면, 그것은 신부의 시선이 아닙니다. 세상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왜 예수님은 도와주시지 않는가”라고 말하게 된다면,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을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아가서 5장 16절에서 여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 여인은 남자의 일부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잘해 주는 부분만, 유리한 부분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여인은 이미 남자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이 어여쁘고 완전한 자로 불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 예수님은 상황이 좋을 때만 좋은 분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순간에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분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저주의 존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신부라 부르시고, 완전하다 하시고, 천국에 있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 안에 있는 자에게 예수님은 부분이 아니라 전부이십니다. 이 전부의 사랑을 아는 자만이,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 자랑은 설명되지 않아도 됩니다. 이해받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그 자랑은 같은 안목 안에 있는 자들만 알아듣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보는 신부로 살아가기를, 그래서 예수님이 전부가 되는 안목으로 하루하루를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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