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제단과 그 모든 기물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 이스라엘 지휘관들 곧 그들의 조상의 가문의 우두머리들이요 그 지파의 지휘관으로서 그 계수함을 받은 자의 감독된 자들이 헌물을 드렸으니, 그들이 여호와께 드린 헌물은 1)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이니 지휘관 두 사람에 수레가 하나씩이요 지휘관 한 사람에 소가 한 마리씩이라 그것들을 장막 앞에 드린지라."(민수기 7:1~3)
장막이 세워졌습니다. 민수기 7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끝내고…” 이 말은 단순한 공사 완료 보고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약속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완성된 날입니다. 시내산에서 계시로 주신 장막은 하늘에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구조물을 본뜬 것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구속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이 장막은 ‘성막’이라 불립니다.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동시에 ‘회막’이라 불립니다.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장막과 그 모든 기구는 땅의 재료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무, 가죽, 금속,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름이 부어지는 순간, 그것들은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기름 부음으로 인해 일상의 재료가 거룩한 만남의 통로가 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성막에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미리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피 흘림과 기름 부음, 이 두 가지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성막은 침묵으로 증언합니다.
장막 봉헌의 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대표들이 헌물을 드립니다. 흥미로운 점은 모든 지파가 똑같은 헌물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소 열두 마리, 수레 여섯 대, 한 사람당 소 한 마리, 수레 반 대, 조금 더 낸 사람도 없고, 덜 낸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제단 봉헌 때 드려진 헌물 역시 열두 날 동안 하루에 한 지파씩, 그러나 내용은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반복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이런 기록을 읽으며 속으로 생각합니다. “한 번만 써도 될 텐데 왜 이렇게 길게 반복할까?” 그러나 본문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면, 이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존엄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헌물을 받아 주신 날입니다. 처음 드린 유다 지파도, 마지막에 드린 납달리 지파도,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동일한 감격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마치 졸업식에서 대표 한 사람만 상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졸업생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그 한 사람도 ‘이하동문’으로 처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앞선 자도, 뒤처진 자도 없습니다. 오직 받아 주심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경쟁으로 돌아갑니다. 더 빨라야 하고, 더 가져야 하고, 더 눈에 띄어야 합니다. 그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 차별을 견뎌야 합니다. 경제력으로, 학력으로, 외모로, 성별로, 배경으로 사람의 가치는 끊임없이 서열화됩니다. 심지어 차별을 없애겠다는 법과 제도마저 또 다른 갈등을 낳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막 앞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장막 안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레위기에서 이미 우리는 보았습니다. 제물의 크기는 달라도, 제물의 효능은 같았습니다. 제사장이 드리는 제물과 백성의 지도자가 드리는 제물과 가난한 자가 드리는 가루 한 움큼의 제물의 그 효력은 동일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물의 가치는 드리는 사람의 능력에 있지 않고,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7장의 절정은 89절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더라” 하나님은 어디에서 말씀하십니까? 율법이 담긴 법궤 위, 그러나 그 율법을 덮고 있는 속죄소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루터는 이 속죄소를 ‘시은좌’,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율법 위에서가 아니라, 속죄 위에서 만나 주십니다. 이것은 분명한 복음의 예표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안에서만 하나님을 만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말씀은 이미 구약의 장막 안에서 울리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장막’이라 부릅니다. 언젠가 반드시 무너질 장막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이 무너질 장막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더 화려하게 꾸미고, 더 단단해 보이게 만들고, 다른 장막과 비교하며 우월함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장막이 임시 거처일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는 덧입을 장막, 무너지지 않을 집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 소망이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차별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로새서 3:11)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에는 서열이 없습니다. 손이 발을 업신여기지 않고, 눈이 귀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서로 돌볼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여전히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차별의 흔적은 드러날 것입니다. 복음보다 취향이 앞설 때도 있고, 은혜보다 자존심이 앞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십자가로 무너뜨리십니다. 무너뜨린 자리에 차별 없는 몸을 다시 세우십니다. 장막이 세워진 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중에 거하겠다.” 이 은혜 앞에서 누가 더 낫고, 누가 덜한지는 의미를 잃습니다. 모두가 은혜로 초대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장막 안에서 오늘도 우리는 같은 은혜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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