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전도서 3:1,5)
전도서 3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리듬으로 다가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인생의 균형, 지혜로운 타이밍의 문제로 자주 이해합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단순한 삶의 처세술을 말하는 책이 아닙니다. 전도서는 인간의 한계와 무력함을 끝까지 몰아붙이며, 결국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책입니다.
그중에서도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다”는 말씀은 유난히 인간적인 표현처럼 보입니다. 좋아하면 안고, 싫으면 멀리하는 것입니다. 감정과 관계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언제나 그렇듯, 이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볼 때 비로소 깊이가 열립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신 후, 그의 옆구리를 찢어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아담이 여자를 보자마자 외친 고백은 유명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 고백은 단순한 감탄이 아닙니다. 두 존재가 하나임을 알아보는 영적 인식입니다. 두 몸이지만 한 생명, 한 방향, 한 뜻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면, 아담이 뻣뻣하게 서서 신학적 선언을 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달려가 끌어안으며 말했을 것입니다. 이 안음은 소유가 아니라 연합입니다. 그러나 선악과 사건 이후, 이 안음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서로를 향해 손을 뻗기보다 서로를 변명하며 떠넘깁니다. 한 몸이던 존재가 이제는 같은 공간에 있어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이때부터 인간의 모든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부부도, 가족도, 공동체도, 민족도, 인류도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이 깨어진 연합을 스스로 회복하려 합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라는 노래처럼, 사랑하자, 하나 되자, 평화를 이루자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 노래가 울려 퍼진 이후에도 세상은 더 분열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여전히 갈라져 있고, 같은 나라 안에서도 이념과 계층, 세대와 이해관계가 서로를 밀어냅니다.
심지어 개인의 삶에서도 그렇습니다. 어제까지 같은 생각을 하던 사람도, 이해관계 하나가 바뀌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어떤 이는 스스로를 평생 진보라 생각하다가, 부동산 문제 하나로 보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바뀝니다. 그러니 인간이 인간을 안겠다고 나서는 모든 시도는, 결국 자기들끼리의 잔치로 끝납니다.
이 지점에서 성경은 방향을 틀어 줍니다. 이사야 40장은 “위로하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위로의 내용은 감정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네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 인생의 허무함을 알려주는 말씀이 곧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광을 붙잡게 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선을 옮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절정에서 선포되는 소식은 이것입니다. “보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이 하나님은 추상적인 분이 아닙니다. 강한 자로 임하시되, 그의 팔로 어린 양을 품에 안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상급’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보상이나 성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안아 주심입니다.
예레미야는 포로의 시대 한가운데서 놀라운 예언을 합니다.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전쟁과 멸망의 시대에, 이 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이 말씀은 분명해집니다. 율법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있던 자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 창기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분을 붙잡습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말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안으십니다. 그 품에 안긴다는 것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리입니다. 누가복음 7장의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끌어안듯 붙잡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풀과 같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말씀 앞에 엎드립니다. 이것이 여자가 남자를 안는 새 일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말로는 십자가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을 안고 삽니다. 성공, 안정, 인정, 자기 의, 종교적 열심, 그것들을 안고 있기에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를 안는 일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놀라움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안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그분의 팔이 가장 넓게 벌어진 자리입니다. 그 팔이 우리를 놓지 않으셨기에, 결국 우리는 다시 그 품으로 돌아옵니다.
전도서의 말씀은 결국 이렇게 들립니다. 그리스도를 안을 때가 있고, 그리스도를 멀리하려는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붙잡으십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여자가 남자를 안는 일, 신부가 신랑을 안는 일, 그러나 그 시작은 언제나 신랑의 안아 주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안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다시 그 품에 안길 수 있을까요. 이 질문 앞에 서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은혜로운 때입니다.
'구약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레위기 - 레위기의 시작, 행함을 무너뜨리고 십자가로 부르시는 하나님 (0) | 2026.01.27 |
|---|---|
| 출애굽기 - 이름은 이러하니, 계시가 없던 시대에도 하나님은 언약을 일하고 계셨다 (0) | 2026.01.27 |
| 아가서 - 사랑의 병 (0) | 2026.01.26 |
| 민수기 -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 (제사장의 축복) (1) | 2026.01.21 |
| 전도서 - 버릴 때와 거둘 때 (0) | 2026.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