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도서 3:1,4)
사람은 누구나 시간을 붙잡고 싶어 합니다.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조금만 앞서 볼 수 있다면 인생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 믿습니다. “그때만 알았더라면…”이라는 말은 거의 모든 인생의 후회 속에 숨어 있습니다. 주식 시장의 급락, 국가적 위기, 개인의 실패와 상실 앞에서 우리는 늘 같은 생각을 합니다. 조금만 먼저 알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전도서 3장은 바로 그 인간의 욕망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이 말씀은 우리를 위로하면서도 동시에 좌절하게 만듭니다. 위로가 되는 이유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인생에도 질서가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절이 되는 이유는, 그 ‘때’를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 때와 죽을 때를 모릅니다. 심을 때와 뽑을 때, 울 때와 웃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그저 결과를 보고 “이게 그때였구나” 하고 뒤늦게 고개를 끄덕일 뿐입니다. 역사를 돌아보아도 그렇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1979년과 1980년에 일어난 격변의 사건들, 만약 그때를 불과 5분 전에만 알았더라면,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정보를 모으고, 예측하고, 통제하려 합니다.
그러나 정작 생명의 때, 구원의 때에는 무관심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알지 못하느냐.” 날씨는 읽으면서도,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지는 묻지 않는 인간에 대해서 전도서는 바로 그 무지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그 포도나무를 옮겨 심으셨고, 돌을 제거하고, 울타리를 두르고, 극상품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들포도였습니다. 정의 대신 포학이 있었고, 공의 대신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뽑아버리겠다.” 이 장면은 잔인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이것은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파괴인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사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뽑고, 파괴하며, 넘어뜨리고, 그 후에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먼저 헐고, 그 다음에 세우십니다. 이 원리는 개인의 인생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왜 이렇게 다 무너뜨리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직장, 관계, 자존감, 내가 의지하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허물어질 때, 그것은 저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의를 심어 놓은 자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채 유지되는 신앙, 종교, 자랑은 반드시 뽑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어떻게 사흘 만에 세운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은 자기 육체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헐리고, 부활로 세워질 성전을 말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하나님이 내 삶에서 무엇을 헐고 계신가? 그리고 무엇을 세우고 계신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던 신앙의 구조물들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괜찮은 신자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면 믿음 있다고 여겼는데…” 그때 하나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헐고 있다. 그리고 다시 세우고 있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허물어지고, 영원한 것만 남습니다.
전도서는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우셨고, 언제 기뻐하셨는가? 놀랍게도 성경은 예수님이 세 번 우셨다고 기록하지만,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한 번, 성령으로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겉으로는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종교가 있지만 정작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도시를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우셨습니다. 부활과 생명이 눈앞에 서 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죽음 앞에서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무지를 보시며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는 통곡하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름을 짜듯, 자신의 생명을 쏟아내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십자가를 피하게 해달라”는 응답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과하여 구원을 이루는 응답으로 들려졌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기뻐하신 순간은 언제였는가? 귀신이 항복했다는 보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 아버지의 뜻이 아들을 통해 계시된 그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이 말씀은 감정 위로가 아닙니다. 종말론적 선언입니다. 지금의 눈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환난은 잠시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 있는 기쁨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가볍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울 일이 많습니다. 견뎌야 할 시간이 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시간이 주님의 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성도는 자기 때를 이루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자기 뜻과 자기 때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조급하지 않습니다. 잠잠히 기다립니다. 눈물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영광을 바라봅니다. 겉사람은 낡아지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눈물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 웃을 때가 있음을 압니다. 주님의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인 것입니다.
'구약 말씀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민수기 - 나실인의 서원(구별됨의 오해와 완성) (1) | 2026.01.14 |
|---|---|
| 아가서 - 향기를 날리라 (0) | 2026.01.12 |
| 구약에 나타난 복음 - 폐허 위에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 (0) | 2026.01.10 |
| 민수기 - 의심의 소제,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0) | 2026.01.07 |
| 전도서 - 날 때와 죽을 때 (0) | 2026.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