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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전도서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9.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도서 3:9~13)

우리는 늘 묻습니다. “이렇게 애써 살아서, 도대체 무엇이 남을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일하고, 계획하고, 버텨 보지만 돌아보면 손에 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전도자의 질문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사람은 본능적으로
때를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언제 성공할지, 언제 안정될지, 언제 인정받을지를 스스로 정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때가 오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때가 늦어지면 분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때는 우리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자, 사람은 또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잘 보이면, 내 중심으로 때가 움직이지 않을까?” 하지만 전도서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때’는 인간의 노력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뜻을 따라 이루시는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애쓴다고 해서, 이런 일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전도자는 냉정하게 말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때를 앞당길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수고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땀 흘려 수고하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타락 이후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질서입니다.

문제는 수고 자체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 수고를 통해 자기의 영광을 영원히 남기려는 마음입니다.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가, 마치 자신이 영원히 이 땅에 남을 수 있는 것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매우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이 ‘영원’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올람입니다. 성경 번역자들은 이 단어를 다양하게 옮겼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는 감각,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마음, 시간 의식, 영원의 감각입니다.

이 모든 번역이 말해 주는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사람은 단순히 오늘만을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이 마음을 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을 찾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 선물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을 사모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영원을 사모하게 됩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영원 추구가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흩어짐을 면하자.” “우리 이름을 내자.”

이것은 단순한 건축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죽음과 소멸을 거부하려는 인간의 몸부림입니다.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삶을 거부하고, 자기 이름을 하늘에 새기려는 시도입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회사 이름, 브랜드, 업적, 기록, 명성, 심지어 교회마저 “흩어지지 말고 더 커져서 이름을 남기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이 땅의 영주가 아니라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단순한 유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후에도 자신의 영광을 유지하고 싶었던 인간의 욕망입니다. 중국 진시황의 무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인간의 왜곡된 영원 갈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노동을 요구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사람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더 거대한 기념비를 세우고, 더 많은 흔적을 남기려 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지혜처럼 들리지만, 실은
하나님 없이 영원을 확보하려는 절망의 고백일지도 모릅니다.

전도자는 결국 깨닫습니다.
영원은 인간이 측량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 먹고 마시며 수고 가운데 만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말은 체념이 아닙니다. 영원을 포기한 허무주의도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평안의 고백입니다.

사람이 추구하는 영원은 언제나
위로, 크기로, 찬란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영원은 십자가였습니다. 낮아짐, 실패, 죽음, 수치.

그래서 십자가는 미련해 보입니다.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영원을 만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을 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자기를 높이지 않고, 자기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 오늘 먹고 마시며 수고할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내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영원합니다.”

이 고백으로 사는 삶,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때를 따라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