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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아가서 - 하나뿐이로구나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9.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아가 6:4~10)

아가서 6장에 나오는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라는 고백에서  ‘완전’이라는 단어가 인간에게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이라도 스스로를 완전하다고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늘 부족함을 자각하며, 고치지 못한 성격과 반복되는 실패 앞에서 고개를 숙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실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도다”라는 바울의 고백은, 인간이 어떤 노력으로도 ‘완전’이라는 상태에 이를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 줍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완전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말은 얼핏 들으면 매우 신앙적이고 성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을 ‘덜 완전한 사람’‘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성경의 기준은 훨씬 단순하고도 냉정합니다. 완전한 자와 완전하지 못한 자, 그리고 완전하지 못한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의 정도는 이 구분을 바꾸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아가서는 뜻밖의 선언을 합니다.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이 가능할까요? 인간이 완전해질 수 없다면, 이 여인은 무엇으로 ‘완전한 자’가 되었을까요? 답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여인의 상태가 아니라, 남자의 사랑 때문입니다. 여인이 흠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모든 흠을 덮어 버렸기 때문에 ‘완전한 자’라는 선언이 내려진 것입니다.

이 사랑의 시선은 4절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 여인의 아름다움을 도시로 비유한다는 것은 매우 독특한 표현입니다. 도시란 질서와 역사, 안정과 위엄을 상징합니다. 세상이 흔히 말하는 외적인 미와는 전혀 다른 기준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자의 눈이 세상의 기준과 완전히 다르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평범하거나 심지어 초라해 보일 수 있는 여인이, 사랑의 눈으로는 디르사( ‘기쁨, 아름다움’을 뜻하는 가나안 성읍 이름으로,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곳)같고 예루살렘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장면을 일상에서도 봅니다. 부모의 눈에 비친 자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보면 그저 평범한 아이일 뿐이지만, 부모에게 그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아이가 실수하고,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치고, 때로는 말썽을 부려도 부모의 사랑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래도 내 아이”라는 고백이 그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아이가 완벽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때문에 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사랑받는 여인은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들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애쓸 이유도 없습니다. 사랑 안에 있기 때문에 이미 당당하기 때문입니다. 이 당당함은 자존감이 높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확고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성도의 위상입니다.

성도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위대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위상입니다. 5절과 6절에서도 남자의 시선은 변함이 없습니다.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5장에 보면, 사랑하는 자가 밤이슬을 맞으며 문을 두드리지만 여인은 귀찮다는 이유로 문을 열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한 매우 미온적이고 실망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관계가 식어도 충분한 장면입니다. 그런데도 남자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시선이 그대로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를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녀가 된 여인을 다시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여인은 이미 다른 남자의 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사랑은 명령으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설명하십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배반하고, 떠나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낭비처럼 보이고, 어리석어 보이고, 불공평해 보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랑 안에서만
“내 완전한 자”라는 선언이 가능합니다.
8절과 9절은 이 사랑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왕의 주변에는 수많은 여인이 있습니다. 왕비, 후궁, 시녀들… 그들은 외적으로 더 화려하고, 경쟁적으로 자신을 가꾸며 왕의 눈길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말합니다.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이것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오직 사랑이라는 관계 안에서만 ‘하나’가 됩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신앙생활 속에서 흔히 빠지는 비교와 경쟁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열심인 것 같고, 더 기도하는 것 같고, 더 성숙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고, 하나님 앞에서 더 노력해야 사랑받을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가서의 고백은 그 모든 생각을 단번에 무너뜨립니다. 사랑은 경쟁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어여쁜 자, 내 완전한 자”로 불립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로 묶인 성도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로 이미 확증된 사랑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더 나은 성도가 되어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은혜가 아니라 행위로 돌아가 버립니다.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이 말 앞에서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결코 완전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완전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자’는 말은 결국 헛된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완전은 목표가 아니라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사랑 안에서만 주어집니다.

마지막 10절의 선언은 이 사랑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사랑받는 여자는 더 이상 초라하지 않습니다. 비교 속에서 자신을 깎아내릴 이유도 없습니다. 왕의 사랑이 이미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랑 아래 있는 성도는 자신의 부족함을 들여다보며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이미 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사랑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여정이 아닙니다. 이미 찾아오신 사랑을 믿고 감사하는 여정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사랑을 찾아 예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을 점검하고 조건을 갖추려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죄 있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붙드시고,
“내 완전한 자”라 불러 주시는 사랑이 복음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온전한 반응은, 더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믿고 기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