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출애굽기 1:20~21)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원제는 “그 이름들이 이러하니라”입니다. 이 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한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이름에 대한 이야기이며, 존재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육의 야곱이 죽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이름을 버리고 언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되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죄 가운데서 벗어나는 참된 출애굽입니다.
출애굽기 1장은 겉으로 보면 침묵의 시간처럼 보입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사이에는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 것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언약을 위해 쉼 없이 일하고 계셨습니다. 다만 인간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방식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본문 출애굽기 1장 15~22절은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산파”로 번역된 히브리어 얄라드는 단순히 출산을 돕는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낳다’, ‘생기게 하다’, ‘산고를 겪다’라는 의미를 포함하며, 창세기의 핵심 구조인 톨레도트, 곧 아들 낳는 역사와 연결됩니다. 창세기가 열 번의 톨레도트를 통해 완전한 언약의 말씀을 전한 것처럼, 출애굽의 시작도 동일한 언약의 흐름 위에 서 있습니다.
“히브리 산파”라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히브리란 ‘건너온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요셉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듯,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옮겨진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산파들은 단순히 용감한 여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위해 죽음을 건너온 자들로 남겨 두신 존재였습니다. 십브라라는 이름은 ‘아름다움’을, 부아라는 이름은 ‘빛남, 뛰어남’을 뜻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이들을 “사람”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히브리어로 ‘첫째(에하드)’와 ‘둘째(셰니)’로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처음 낳은 아들을 아름답게 하고, 그 아들을 빛나고 뛰어나게 만드는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신다는 상징입니다. 아들 낳는 역사, 곧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결단이나 용기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출애굽이나 사도행전 시대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애굽의 일상 속에서 생육하고 번성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자기 언약을 이루고 계십니다. 산파들이 존재했고, 그들이 아들을 살렸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그 죽음에 동참하도록 이끌림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조용하지만 분명합니다. 애굽 왕은 산파들에게 “그 자리를 살펴서” 남자 아이면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그 자리”로 번역된 히브리어 오벤은 ‘두 개의 돌’, ‘녹로’, ‘산파의 출산 의자’를 뜻합니다. 이 단어는 예레미야 18장에서 토기장이의 녹로로도 등장합니다. 둘이 하나이고, 하나가 둘인 구조, 곧 생명의 창조를 상징하는 도구입니다. 왕은 이 돌 위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분했습니다. 딸은 살리고 아들은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는 그 ‘아들’을 다르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살려야 할 아들, 곧 살려 주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 아들을 죽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아들이 자신을 살리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 산파들은 언약 안에서 이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의 뜻을 두려워했습니다.
산파들이 왕에게 대답한 말은 단순한 변명이 아닙니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여 산파가 이르기 전에 해산한다”는 말은 두 언약에 대한 고백입니다. 히브리 여인과 애굽 여인은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자유하는 여자’와 ‘종의 여자’의 비유와 연결됩니다. 현실적으로는 히브리인이 종이지만, 언약적으로는 정반대입니다. 히브리 여인은 성령을 따라 난 자로 생명을 낳고, 애굽 여인은 육체를 따라 종을 낳습니다. “건장하여”라는 표현 역시 ‘살아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히브리 여인이 언약 안에서 생명으로 살아 있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여기서 모든 초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시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끄셔서 마땅히 놓여야 할 자리에 두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창조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야곱 언약, 모두 동일하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으로 흐릅니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종말이란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사건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진리가 충만히 드러난 상태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산파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십니다. 이 말은 단순히 가정이 잘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사’라는 단어는 ‘이루다, 행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들을 살리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집을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입니다. 하나님의 집에 합류되는 것, 그 이름들 속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비진리의 명령은 계속되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결코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기 백성을 생명으로 옮기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이며, 출애굽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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