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출애굽기 1:7,12)
출애굽기는 흔히 “탈출의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노예였던 이스라엘이 기적처럼 애굽을 빠져나온 사건,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가 내리고 율법이 주어지는 드라마틱한 장면들 말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첫 문장은 그런 극적인 장면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출애굽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이 문장은 마치 족보처럼 담담합니다. 사건도 없고, 기적도 없고, 감정의 고조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출애굽기의 깊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건’보다 먼저 ‘이름’을 말씀하십니다.
출애굽 연대를 주전 1446년으로 볼 때, 요셉이 죽은 해(주전 1805년)부터 모세가 태어난 해(주전 1526년)까지는 약 279년의 시간이 흐릅니다. 이 기간 동안 성경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도 없고, 새로운 말씀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긴 시간 동안 이스라엘은 어떤 상태에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정말 침묵하고 계셨을까요?
출애굽기 1장은 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말씀은 없었지만, 언약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기록되지 않은 자리에서도 자기 언약을 향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공백기처럼 보이는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언약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고, 말씀을 들어도 이전처럼 마음이 뜨겁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셔도, 언약을 쉬지 않으십니다.
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원문은 “웨엘레 셰모트(그리고 이름들은 이러하다)”로 시작합니다. ‘그리고’라는 접속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끊어진 책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임을 선언하는 단어입니다. 사람의 눈에는 279년의 공백이 있지만, 하나님의 이야기에는 공백이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된 언약은 출애굽기에서 다른 방식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대를 건너뛰며 일하십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시작된 언약이, 다음 세대에서는 고난으로, 또 그 다음 세대에서는 구원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출애굽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준비된 결과인 것입니다.
본문은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교차해서 사용합니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표현이 아닙니다. 야곱은 육의 사람을,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한 후 새 이름을 받은 존재를 상징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꾀와 힘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허벅지를 치십니다. 성경에서 허벅지(야레크)는 힘과 생식, 곧 생명의 근원을 상징합니다. 야곱의 허리가 꺾였다는 것은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 자기 힘의 죽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이름인 이스라엘이 주어집니다. 이제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장은 이 메시지를 다시 반복합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은 모두 칠십이요.” 이 말은 단순한 숫자 설명이 아닙니다. 죽은 야곱에게서 새로운 언약의 공동체가 시작되었음을 말합니다. 출애굽은 애굽에서 나오는 사건 이전에, 이미 야곱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생육하고 번성했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강하여 온 땅에 가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노예였습니다. 강한 민족이었다면 애굽을 다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온 땅”이라는 표현입니다. 히브리어는 이것을 단순한 지리적 확장이 아니라 고센 땅 안에서의 충만함으로 말합니다. 즉, 세상적으로 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언약 공동체로 충만해졌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싸우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리시기 전까지,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이 왕을 “헤테로스”, 즉 전혀 다른 차원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언약을 모르는 왕, 은혜를 모르는 왕, 요셉을 통해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왕인 그는 이스라엘을 위협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언약을 모르는 자에게 언약 백성은 언제나 불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종교는 교회를 세우지만 복음을 미워하고, 열심을 말하지만 은혜를 싫어합니다. 행위로 의를 이루려는 신앙은 반드시 복음을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애굽의 해결책은 이것이었습니다. “지혜롭게 하자.” 그러나 그 지혜는 세상의 지혜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곧 노동과 율법으로 억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종교 구조와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예배 횟수, 봉사 점수, 헌금 액수, 직분의 무게,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믿지만, 실상은 바로를 위한 국고성을 쌓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돔과 라암셋은 하나님의 성전처럼 보이지만, 실은 애굽의 창고입니다. 언약 백성의 수고로 세워진 비진리의 저장고인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역설이 일어납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이스라엘은 더욱 번성합니다. 진리는 억압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무게 속에서 복음은 더 선명해집니다. 환난과 핍박은 교회를 약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참된 교회를 드러낼 뿐입니다. 벽돌을 굽고, 흙을 이기고, 땅의 일을 하게 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출애굽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출애굽은 애굽을 떠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출애굽은 율법의 이름에서 은혜의 이름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르던 이름에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름은 이러하니.” 하나님은 오늘도 묻지 않으십니다. “너는 무엇을 했느냐?” 대신 물으십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그리고 그 이름을, 언약 안에서 새롭게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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