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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전도서 - 찾을 때와 잃을 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3.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도서 3:1,6~8)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새로워짐’을 말합니다. 달력이 바뀌었고 숫자가 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뭔가 달라질 것처럼 기대합니다. 헬스장 등록을 하고, 다이어리를 새로 사고, 마음속으로 결심을 세웁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짜의 변경이 우리를 바꾸지 않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새로워지는 유일한 길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래서 전도서 3장이 말하는
‘때’는 단순한 계절표나 인생의 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피할 수 없이 통과해야 하는 존재의 자리입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 이 말은 너무 당연해서 가볍게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거의 언제나 이 순서를 거꾸로 삽니다. 연말이 되면 주소록을 정리합니다. 연락하지 않는 사람을 지우고, 의미 없어 보이는 관계를 정리합니다. 교회도 송구영신이라 하여 ‘보낼 것’‘맞이할 것’을 말합니다. 문제는 무엇을 기준으로 지키고, 무엇을 버리느냐입니다.

우리는 생명은 버리고, 썩을 것은 붙듭니다. 영원한 것은 가볍게 여기고, 사라질 것은 목숨처럼 움켜쥡니다. 말씀보다 체면을 지키고, 진리보다 관계를 지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은 쉽게 내려놓고, 사람 앞에서의 인정은 끝까지 붙듭니다. 이런 송구영신은 사실 새로움이 아니라 반복되는 타락입니다. 전도서의 지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정말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있느냐?”

옷을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습니다. 관계도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로 관계가 찢어지기도 하고, 긴 시간의 인내로 다시 꿰매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말씀을 단순한 인간관계의 기술로 말하지 않습니다. 호세아는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이 찢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우리의 의를, 우리의 자기 확신을 찢으십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파괴가 아닙니다.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찢으신 뒤에 반드시 싸매십니다. 치신 뒤에 반드시 고치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를 품에서 내려놓는 것처럼, 주님은 때로 안는 일을 멀리하십니다. 그 순간 우리는 버림받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돌아오게 하기 위한 거리두기입니다. 찢으심은 포기가 아니라 부르심입니다.

우리는 참 이상합니다. 말해야 할 때는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때는 꼭 말을 합니다.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입을 다뭅니다. 진실을 말해야 할 자리에서 손해가 예상되면 침묵합니다. 반대로, 가만히 있어야 할 때는 참지 못하고 말을 보탭니다. 변명, 해명, 자기방어, 평가, 판단이 쏟아집니다. 그래서 삶이 늘 시끄럽습니다.

야고보는 혀를
“쉬지 않는 독”이라 부릅니다. 인생을 불사르는 불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혀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잠잠할 때와 말할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마음, 자기중심적인 마음이 입을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이 부분에서 완전한 분이십니다. 헤롯을 향해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시되, 빌라도 앞에서는 침묵하십니다. 대제사장들의 거짓 고발 앞에서도 변론하지 않으십니다. 그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순종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의 침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아시고 이루신 분입니다.

사람은 사랑과 미움을 너무 쉽게 자기 감정의 문제로 여깁니다. 기분이 좋으면 사랑하고, 상처받으면 미워합니다. 내 기준에 맞으면 끌어안고, 어긋나면 밀어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로마서 9장은 야곱과 에서를 말하며, 하나님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랑과 미움을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 앞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을 심판대에 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미워함조차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피조물의 자리를 거부하는 죄입니다.

전쟁과 평화조차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말합니다. 손해가 크면 전쟁을 말하고, 이익이 크면 평화를 말합니다. 국가도, 개인도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때조차 내가 준비되었을 때 오시기를 원합니다. 모든
‘때’를 나 중심으로 재단합니다. 전도서의 ‘때’는 이런 인간의 실체를 드러냅니다. 우리는 끝까지 자기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존재입니다.

전도서 3장 6절은 말합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찾으시는” 장면은 창세기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이것은 이미 잃어버리셨다는 뜻입니다. 누가 잃어버렸습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왜 선악과를 만드셨습니까?” 이 질문 자체가 타락의 증거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심 자체가 은혜입니다.

구약의 목자들은 실패했습니다. 양을 돌보지 않고 잡아먹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고 하십니다. 다윗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반면 이방 여인과 백부장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임을 압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습니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삭개오의 변화는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의 의로 완벽하다고 여길 때 그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야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얻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다.”

이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릴 것입니까? 잃어버렸다가 찾아진 자는 압니다. 무엇이 진짜 생명인지, 무엇이 썩을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삶 속에서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언제 말해야 하는지,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 무엇을 잃어야 참으로 얻는 것인지를 배워갑니다.

지금은 찾으실 때입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그리고 이때를 아는 자는, 더 이상 자기 중심으로
‘때’를 해석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잃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