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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아가서 - 찾으리라,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찾아냄이 된 사랑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2. 2.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아가 6:1~3)

사람은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어 합니다. 불안할수록 더 그렇습니다. 관계도 그렇고, 신앙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우리는 곧바로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게 됩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이제 제 쪽을 좀 봐주십시오.”

그러나 성경은 이 익숙한 종교적 태도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며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열심이나 이해력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열심히 찾으면 만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사야 6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노라.” 이 말은 충격적입니다. 찾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가 여기 있다”고 먼저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인간의 모든 종교적 자부심은 무너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들조차, 실은 이미 찾아오신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가서 5장에서 여인은 사랑하는 자를 찾아 헤맵니다. 밤거리로 나가고, 상처를 입고, 친구들에게까지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은 묻습니다. “네 사랑하는 자가 다른 이의 사랑하는 자보다 무엇이 그리 나으냐?” 여인은 장황하게 사랑하는 자를 설명합니다. 그의 모습, 그의 아름다움,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전체가 사랑스럽다.” 이 고백을 들은 친구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디로 갔느냐?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오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찾아서 만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처음부터 여인이 사랑을 시작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인이 사랑을
‘발견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이 노래는 처음부터 사랑이 여인을 찾아온 이야기입니다. 여인의 갈망 이전에, 이미 사랑은 그녀를 알고 있었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6장에서 여인은 더 이상 헤매지 않습니다. 갑자기 길이 또렷해집니다.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갔다.” 그의 동산은 여인이 만들어 놓은 장소가 아닙니다. 여인이 열심히 가꾸어 놓은 종교적 공간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가 머무는 자리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만남의 장소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만날 장소를 스스로 설계합니다. 조용한 새벽기도 시간, 깊은 묵상 중인 순간, 눈물 나는 예배의 한 장면…. 물론 하나님은 그런 자리에서도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를 조건으로 만들 때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주님을 만날 수 있지.” “이만큼은 해야 응답을 기대할 수 있지.” 이렇게 되면 신앙은 은혜가 아니라 기술이 됩니다. 사랑이 아니라 성과가 됩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 내가 불러들이는 손님이 됩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이 착각을 깨뜨립니다. 열두 살 예수는 부모와 헤어져 성전에 계셨습니다. 사흘 만에 찾은 부모가 말합니다.
“우리가 너를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 아느냐.”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는 분명 ‘집 안에 있어야 할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정해 놓은 자리에 머무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있는 자리에 계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만든 신앙의 동산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증거되는 자리, 곧 십자가에 계십니다.

그래서 아가서 6장 3절의 고백은 너무도 단순하고, 동시에 심오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이 말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성취도 없습니다. 증명도 없습니다. 다만 관계만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그분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것으로 삼으셨기에, 우리는 그분께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관계 안에 들어오면, 신앙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더 이상 무엇을 채워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완성된 사랑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품에서 잠드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그 품에 들어가기 위해 자격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안깁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쉽니다.

성전은 제사가 드려지는 곳입니다. 희생이 증거되는 자리입니다. 그 모든 제사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십자가야말로 예수님이 계시는 집입니다. 용서가 능력이 되고, 사랑이 현실이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만 예수님을 제대로 만납니다.

내가 만든 경건의 장소가 아니라, 내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 내 열심이 부인되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찾지 않았는데 찾아오셔서, 나를
“찾아냄”이 되어주신 사랑을 알고 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감사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이 성령 받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쌓아 올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열심으로 찾는 사람이 아니라, 찾아진 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를 찾게 된 가장 큰 기적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