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에 아론과 모세가 낳은 자는 이러하니라.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장자는 나답이요 다음은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이니,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 받은 제사장들이라.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어 자식이 없었으며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의 아버지 아론 앞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였더라."(민수기 3:1~4)
이스라엘의 진은 언제나 성막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목적지를 향해 흩어져 걷는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을 중심에 두고 질서 있게 행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배치된 열두 지파, 그 한가운데 있는 성막은 단순한 예배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실체를 땅 위에 그림자로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중심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말씀은 레위지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지 한 지파의 직무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명을 어떻게 보시고, 무엇으로 속량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계시입니다.
거룩함은 가까울수록 가볍지 않습니다. 아론의 아들들 가운데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장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앞에 다른 불을 드렸고, 그 자리에서 생명을 잃었습니다. 레위기 10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가 거룩함을 나타내리라.”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특권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일입니다. 거룩은 인간의 열심이나 창의성으로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예배는 ‘내가 드리고 싶은 것’을 드리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어떤 이들에게 ‘위험한 동행’이라 불립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거룩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자리는 다르지만 모두가 거룩합니다. 아론의 아들들은 제사장의 직무를 맡고, 다른 레위인들은 성막의 운반과 관리, 봉사를 맡았습니다. 이는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역할의 구분이었습니다. 모두가 거룩한 일을 맡았지만, 모두가 같은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 구분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생깁니다. 레위지파 가운데 일부는 자신들의 위치에 불평하며 반역했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질서가 은혜이며, 순종이 생명입니다.
장자는 죽음에서 살아난 생명의 증거였습니다. 출애굽의 밤,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어린 양의 피로 살아났습니다. 장자는 한 가정을 대표하는 존재였기에, 장자의 생존은 “우리는 피로 구속된 민족이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제 각 지파의 장자를 계속 택하지 않으시고, 레위지파를 대신 세우십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자를 대표하는 지파가 됩니다. 이것은 행정적 효율이 아니라, 제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교육이었습니다. “너희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라.” 하나님은 레위지파를 통해, 온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인지 잊지 않게 하십니다.
생명은 돈으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레위인의 수는 22,000명이었고, 이스라엘 장자의 수는 22,713명이었습니다. 숫자가 맞지 않았기에 초과된 713명은 성소의 세겔로 다섯 세겔씩 속전을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생명은 돈으로 속량될 수 없습니다.
시편 49편은 선언합니다.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존귀해 보여도,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생명을 사려는 인생은 결국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과격한 표현이 아니라, 영원 앞에서의 냉정한 진단입니다.
속전을 지불받지 못한 생명은 사망이 목자가 됩니다. 그 끝은 스올, 무덤, 어둠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대속을 받은 자는 하나님이 친히 영접하십니다. 그 영혼은 스올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이 갈림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며 사는가에 따라, 우리의 목자가 달라집니다.
베드로전서는 이 모든 그림자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너희가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민수기의 레위지파, 장자의 대속, 속전의 개념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향해 흐릅니다. 지상의 성막은 그림자였고, 예수님은 하늘 성소의 참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모른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아는가가 아니라, 새겨졌는가입니다. 새 언약의 능력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마음에 기록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서 우리 안에서 작동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재물로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존귀함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피로 값 주고 사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성막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속량된 생명이다.” 이 고백이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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