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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말씀 묵상

민수기 - 의심의 소제,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7.

“그의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가서 그를 위하여 보리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헌물로 드리되 그것에 기름도 붓지 말고 유향도 두지 말라 이는 의심의 소제요 죄악을 기억나게 하는 기억의 소제라”(민수기 5:15)

사람은 의심 없이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관계일수록 그렇습니다. 멀어지지 않았는지, 변하지 않았는지, 혹시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한 것은 아닌지, 의심은 관계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 되기도 하고, 동시에 관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 되기도 합니다.

민수기 5장에 나오는
‘의심의 소제’는 바로 이 관계의 위기 한가운데서 주어진 율법입니다. 한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지만 증거는 없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도 없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 즉, 의심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이 제사는 보리 가루로 드립니다. 기름도 없고 유향도 없습니다. 감사도 기쁨도 없는 제물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의심의 소제”, “죄악을 기억나게 하는 기억의 소제”라고 부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축하 케이크도, 꽃다발도 없는 자리, 웃음도 박수도 없는 자리, 다만 진실만이 요구되는 자리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초라한 제사를 받으실까요? 이 제사의 목적은 문제를 멋지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숨김없이 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이 가능합니다. 법정에서도 증거가 없으면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릅니다. 이 제사는 여인에게
“너 자신을 여호와 앞에 세우라”고 요구합니다.

본문을 읽다 보면 토기, 성막 바닥의 티끌, 쓴 물, 저주의 글씨 등 겉으로는 매우 미신적이고 주술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핵심은 재료에 있지 않습니다. 핵심은 맹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하는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간음이 있고, 의심이 있고, 거짓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묻지 않으십니다.
“증거가 있느냐?” 대신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여호와 앞에서 이 말을 할 수 있느냐?” 만약 정말 죄가 있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거짓으로 버틴다면, 당장은 아무 일 없어 보여도 그 삶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즉, 이 제사는 즉각적인 저주보다 더 무서운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사람이냐?”

이 본문을 두고
“왜 남편만 아내를 의심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이 남성 중심적이라는 비판도 여기서 나옵니다. 그러나 이 법의 실제 기능을 보면 정반대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인은 가장 약한 존재였습니다. 말 한마디로 쫓겨날 수 있었고, 억울함을 호소할 길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남편에게 함부로 판단할 권한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내를 죽이거나 쫓아낼 수 없게 하셨습니다. 반드시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오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을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한 인간입니다. 예수 시대에도 율법을 가장 잘 안다는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율법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를 기억하게 하고, 회개의 길로 부르기 위한 장치였습니다.

이제 시선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로 옮겨갑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하나님을 남편, 이스라엘을 아내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 아내는 끊임없이 바람을 피웁니다. 돌과 나무와 더불어 행음하고, 우상을 따라다닙니다. 율법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이미 이혼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에는 이혼증서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다시 부르십니다.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이다.”

예레미야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속이고 떠나감 같이 너희가 나를 속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다시 품으십니다.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자기 자신이 부정해지는 길을 선택하시면서까지 말입니다. 그 절정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바람난 아내를 다시 맞아들이기 위해 스스로 저주를 담당하십니다.

의심의 소제는 결국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 앞에서 살고 있느냐?” 이 질문은 신약에서도 반복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질투한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너희에 대하여 의심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의심의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더 경건해 보입니다. 절기를 지키고, 규칙을 따르고,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흐리게 한다면 그것은 영적 간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합니다. 신부가 다시 옛 연인에게 돌아갈까 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가 헛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의심의 소제는 이렇게 다가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 내 신앙의 중심에 정말 그리스도의 피가 있는가? 혹시 더 그럴듯한 다른 복음에 마음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의심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의심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느냐, 아니면 스스로 합리화하며 덮어두느냐인 것입니다.

의심의 소제는 우리를 정죄하기 위한 제사가 아닙니다. 기억하게 하기 위한 제사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신부인지, 누가 우리를 값 주고 사셨는지를 기억하게 하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는 결국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를 씻어 티도, 흠도 없는 신부로 만드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의심을 안고, 연약함을 안고 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 남편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은혜 앞에서 다시 주께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의심의 소제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복된 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