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아가 4:12~16)
우리는 선택받았다는 말을 쉽게 듣지만,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사랑할 자를 이미 정하셨다면, 오늘 우리가 애써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수고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며 열심히 살아야지.”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경건하고 바람직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인간이 은근히 끼어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자신의 열심과 성실, 헌신을 더하여 조금 더 나은 성도가 되려는 욕망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그렇게 낙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라고 고백했고,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선택받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선택받지 못했다고 항의할 자도 없고, 선택받았다고 자랑할 자도 없습니다.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일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아가서의 말씀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동산은 원래 열려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우물은 덮여 있으면 쓸모없습니다. 샘은 흘러야 생명이 됩니다. 그런데 신랑은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한 샘을 향해 “내 신부”라 부릅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신부의 노력이나 관리 상태를 칭찬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신랑만을 위한 존재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동산을 잠근 것은 신부가 아니라 신랑입니다. 우물을 덮고 샘을 봉한 것도 신랑의 손길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신랑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해합니다. “하나님께 더 사랑받기 위해 내가 나를 가꾸어야 한다.” “조금 더 성숙한 신자가 되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마치 결혼을 앞둔 신부가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부족해 보일까 봐” “더 예뻐 보여야 사랑을 잃지 않을 것 같아서” 잠 못 이루며 자신을 꾸미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가서의 신랑은 말합니다. “너는 이미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다.” 신부의 아름다움은 추가된 장식이 아니라, 신랑의 사랑 그 자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반드시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지금도 사랑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아는 성도는 자신을 더 멋지게 만들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선함을 덜어내고, 자신의 열심을 내려놓고, 자신의 의를 십자가 앞에 벗어놓습니다. 이것이 잠근 동산의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큰 헌신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 “향기 나는 신앙인이 되고 싶다.” 사람들 앞에서는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는 오히려 악취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향기가 그리스도의 향기가 아니라 자기 의의 향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랬습니다. 열심히 봉사했고, 교리를 지켰고, 거짓 교사를 분별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 한 가지를 책망하셨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 처음 사랑이란, 내가 시작한 사랑이 아니라 주께서 시작하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더할 수 없고, 그저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주님이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신 것은, 더 열심히 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처음 사랑 앞에서 다시 나 자신이 부인되고, 주의 사랑만 자랑되게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가서의 여인은 마침내 이렇게 노래합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북풍은 차갑고 거칩니다. 남풍은 따뜻하지만 때로는 습합니다. 어떤 바람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인생에 부는 바람이 무엇이든, 그 바람을 통해 사랑의 향기만 날려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더 이상 자기 인생의 평안이나 만족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랑의 사랑이 드러나기만 하면 충분한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기도입니다. “주님, 나를 더 행복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주님, 어떤 바람이 불어도 주의 사랑이 드러나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만난 사랑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더 증명하지 않아도 되고, 더 꾸미지 않아도 되고, 더 쌓아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잠근 동산처럼, 덮은 우물처럼, 봉한 샘처럼, 오직 주의 사랑만 간직한 신부로 살아갈 때, 그 향기는 애쓰지 않아도 바람을 타고 흘러갑니다. 오늘도 북풍이 불든 남풍이 불든,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향기가 날려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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