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언어와 문화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습니다. 숨 쉬고, 자라고, 늙고, 또 새로운 형태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시대가 흐르면 언어와 문화가 변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무리 옛것이 좋다고 말해도, 시간을 거슬러 언어와 문화를 붙잡아 둘 수는 없습니다. 변화는 막을 수 없는 흐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공간에서는 언어와 문화가 하루가 멀다 하고 태어나고 사라집니다. 어제 유행하던 말이 오늘은 촌스러워지고, 오늘 막 등장한 표현이 내일은 전 세계로 퍼져 나갑니다. 이런 시대에 책으로만 언어를 배운 사람은 실제 대화에서 벽에 부딪히기 쉽습니다. 시험 문제는 잘 풀지만, 실제로 입을 여는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아름답다’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 자연스럽게 handsome이나 beautiful을 떠올립니다. 교과서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영국이나 미국의 일상 대화에서 이 단어들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사람의 외모를 두고 영국에서는 ‘fit’이라는 표현을, 미국에서는 ‘eyeful’이라는 표현을 더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
풍경이 아름다울 때도 beautiful보다는 fantastic, lovely, fine 같은 표현이 훨씬 자주 등장합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현지에서 “You are very beautiful”이라고 말하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딘가 어색한 느낌을 줍니다. 마치 우리가 일상 대화에서 “참으로 단아하십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의미는 전달되지만, 시대의 언어는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언어와 문화가 변하듯, 영적인 세계도 시대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변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 표현하고 누리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재해석됩니다. 이것은 성경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식입니다.
만약 우리가 고전적인 표현과 낡은 방식만을 고집한다면, 사람들과의 소통은 점점 어려워질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문화가 세분화되고, 세대 간 언어가 갈라진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메시지를 보면, 기성세대는 외국어를 읽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십시오’라는 네 글자를 ‘하삼’이라는 두 글자로 줄여 쓰는 것에서 시작해, 수많은 축약어와 신조어들이 온라인을 넘어 일상 언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문화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결국 언어의 단절은 관계의 단절로 이어지게 됩니다. 영적인 세계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영적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령과의 친밀한 교제는 점점 형식으로만 남게 됩니다.
성령은 전통을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으십니다. 성령의 특징은 조화(harmony)입니다. 오래된 교리와 새롭게 나타나는 증거들, 말씀과 삶,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균형을 이룰 때 성령의 역사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보수적인 교회에서는 “옛것만이 옳다”는 생각이 굳어져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기대 자체가 사라지기 쉽습니다. 방언조차 부담스럽게 여기고, 다른 은사들에 대해서는 아예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은사는 자랑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도구인데, 그 도구를 거부한 채 열심만 강조한다면 영적인 헌신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
건강한 교회는 성령의 조화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먹고사는 문제만을 붙들고 살던 시대를 지나, 오늘날 사람들은 삶의 질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아름다움의 기준도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얼굴만 예쁘면 미인이라 불렸지만, 이제는 몸 전체가 균형을 이루는 ‘건강한 아름다움’, 즉 피트니스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특징 역시 변화에 있습니다. 거듭남의 가장 분명한 표지는 ‘변화’입니다. 옛사람이 지나가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극적인 변화를 경험합니다. 죄로 가득했던 삶에서 돌이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모습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성품이 온순하고 선했던 사람이 거듭나면,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모태신앙인들은 “내가 정말 거듭난 것이 맞나?”라는 질문을 품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변화의 본질은 겉모습이 아니다. 변화의 핵심은 성령의 충격과 감동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 주고, 익숙했던 세계관을 흔들어 깨웁니다. 이 감동은 주로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만 감동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낡은 방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10년 넘게 영어를 배웠지만, 실제 회화 앞에서는 얼어붙는 것과 같습니다. 문법은 알지만 살아 있는 언어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연인을 소개하면서 “This is my lover”라고 말하면, 요즘 영어권에서는 불륜 관계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intimate friend’라는 표현도 친한 친구가 아니라 연인 관계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큽니다. 의미를 모르면 소통은 오히려 오해를 낳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성령과의 소통에서 잘못된 언어와 방식을 사용하면서, 왜 응답이 없는지 의아해합니다. 알지 못하면서 따라 하는 기도, 목적도 방향도 없는 기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성령의 감동은 삶을 살아 움직이게 만듭니다. 감동이 있을 때 신앙은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감동을 잃으면 형식만 남습니다. 그러면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묶는 규칙과 제도를 더 강화하려 합니다. 그것이 신앙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태도를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마 23:15). 한때는 신선했던 제도가 시대가 변하면서 오히려 성령의 흐름을 막는 족쇄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변화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은 감동을 받으면 움직입니다. 그러나 그 감동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인 감동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렀습니다.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워지는 상태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영적 이해와 방법이 필요하고, 그 길을 안내해 줄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성령 안에서 변화하는 삶, 시대와 소통하는 신앙, 살아 있는 언어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영성입니다. 변화는 타협이 아닙니다. 변화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언제나 생명이 있는 곳에서 역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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