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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이야기

주님의 품에 기대어 신앙을 배운 사람 - 요한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9.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한복음 13:23)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은 늘 조금 특별해 보입니다. 그는 가장 나이가 어렸고, 그래서인지 복음서 속 그의 모습에는
‘막내’ 특유의 자유로움과 따스함이 배어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질문을 준비하고, 순서를 지키고, 서로 누가 크냐를 논할 때, 요한은 말없이 주님의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무릎에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했고, 말씀을 들을 때도 주님의 품 가까이 머물렀습니다.

어떤 아이는 말로 사랑을 배우고, 어떤 아이는 품에서 사랑을 배웁니다. 요한은 후자였습니다. 그는 설명보다 체온으로, 교훈보다 심장 박동으로 주님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기보다 먼저 느꼈고, 이해하기 전에 먼저 안겼습니다. 아마 그는 주님의 숨결과 체온, 가슴에 귀를 대고 들었던 심장 소리 속에서
“이분은 진짜 사람이시다”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훗날 자신을 소개할 때 다른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베드로와 함께한 요한”도 아니고, “열두 제자 중 하나”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을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자랑이 아니라 고백입니다. “나는 사랑받았고, 나는 그 사랑을 알고 있다”는 고백 말입니다.

요한의 신앙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경험의 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영성은 독특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정의하기보다 느끼게 하고, 설명하기보다 체험하게 합니다. 우리가 난로 곁에 앉아 있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누군가는 난로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연료가 무엇이고, 열이 어떻게 전달되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는 말없이 손을 내밀어 말합니다.
“따뜻하지?” 요한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담대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 말은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주님의 품에서 체온으로 배운 진술입니다.

반면 바울의 사랑은 고난의 자리에서 길어 올린 사랑입니다. 바울은 매를 맞고, 배고프고, 오해받고, 감옥에 갇히는 가운데서 배운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요한의 사랑이 따뜻한 품의 언어라면, 바울의 사랑은 십자가를 통과한 인내의 언어입니다. 둘은 다르지만, 모두 참입니다. 다만 요한은 사랑을 빛과 생명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품에서 느낀 온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읽다 보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른 복음서에 넘쳐나는
‘회개하라’는 외침이 요한복음에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요한은 끊임없이 이 말을 반복합니다. “믿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요한은 ‘믿는다’라는 동사를 무려 98번이나 사용합니다. 또 ‘안다’라는 표현을 ‘믿는다’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왜일까요? 요한에게 믿음은 결단 이전에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믿음이란
“결심합니다”가 아니라, “이미 살아났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마치 빛을 본 사람에게 “빛이 있느냐?”고 묻지 않듯이, 생수를 마신 사람에게 “정말 물이 있었느냐?”고 묻지 않듯이, 요한에게 믿음은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명할 때 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이 말들은 교리가 아니라 만져본 진실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인간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강조합니다. 그가 가현설, 즉 “예수는 실제 사람이 아니었다”는 주장에 단호히 반대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한 바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 요한은 예수를 몸으로 경험한 증인이었습니다.

요한의 영성은 교회 역사 속에서 늘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제도보다 관계를, 직분보다 친밀함을, 구조보다 생명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빠르게 성장했고, 질서와 권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직분을 만들고, 제도를 세우고, 규범을 강화해 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울의 수평적
‘형제 사랑’과 베드로의 권위 중심적 영성은 교회를 세우는 데 매우 유용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영성은 달랐습니다. 그는 교회를 말할 때조차 개인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먼저 말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한에게 교회란 조직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의 직급이나 체계를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요한에게 모든 성도는 왕이요, 제사장이며, 증인입니다. 이런 영성은 제도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밀려났습니다.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신앙은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어떤 모습일까요?
말씀은 많지만 체온은 적고, 교리는 분명하지만 생명은 희미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설명할 줄은 알지만, 주님의 품에 기대어 심장 소리를 들을 줄은 모릅니다. 요한의 영성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주님을 얼마나 가까이서 알고 있는가? 당신의 믿음은 설명인가, 경험인가? 당신의 신앙은 제도 속의 소속인가? 생명의 연결인가?

신앙은 결국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요한은 말합니다. 그 품에서 우리는 빛을 보고, 생수를 마시고, 성령을 숨 쉬게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다시 요한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명보다 체온으로, 규칙보다 생명으로, 제도보다 사랑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리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