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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이야기

은사와 능력 사이에서 길을 잃은 교회

by HappyPeople IN JESUS 2026. 1. 9.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2:7)

교회 안에서
“은사”라는 단어만큼 오해를 많이 받은 말도 드뭅니다. 어떤 이에게 은사는 부러움의 대상이고, 어떤 이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누군가는 은사를 가진 사람을 신비롭게 바라보고, 또 누군가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은사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젓습니다. 이 모든 혼란은 사실 한 가지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이 능력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 여기서 말하는 유익은 개인의 만족이나 영적 우월감이 아닙니다. 오직 교회 공동체의 유익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와 매우 비슷해 보이지만, 목적이 전혀 다른 능력이 또 등장합니다.

마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타날 표징을 말씀하십니다. 귀신을 쫓고, 새 방언을 말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일들입니다. 겉으로 보면 고린도전서의 은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능력은 같아 보이지만 같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집회 중에 한 사람이 나와 간증했습니다.
“기도받고 병이 나았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그 사람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신앙도, 삶도 이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병은 나았지만, 사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치유는 은사였을까요, 표징이었을까요? 야고보서가 말하듯, 여러 사람이 함께 믿음으로 기도할 때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가 아니라 믿음의 역사입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특정 인물에게 집중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책임도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다릅니다. 어떤 개인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그 사람이 기도하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은 그 사람에게 쏠립니다. 그의 말 한마디, 태도 하나가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은사는 위험합니다. 잘못 사용하면 교회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분.” 이 말은 얼핏 겸손해 보이지만, 실상은 큰 오해입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달란트는 그냥 받은 것이니, 잘못 쓰느니 아예 쓰지 말자.” 오늘날 은사를 대하는 많은 태도가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니 알아서 역사하시겠지.” “은사는 성령님이 하시는 거니까, 나는 그냥 통로면 돼.”

그러나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은사는 심고, 뿌리고,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받은 순간부터 책임이 시작됩니다. 은사는 자동으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우지 않으면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과거 한국 교회가 은사로 인해 겪은 많은 상처는
은사를 잘못 받아서가 아니라, 은사를 모르고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방언만큼 혼란이 많은 은사도 없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방언을 하면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해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의미 없는 소리 같아요.” 사실 그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는 방언은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방언을 분명히 구분합니다.

개인의 영을 세우는 기도로서의 방언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주어지는 각종 방언의 은사가 있습니다. 기도로서의 방언은 모든 성도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영을 강건하게 하고, 죄의 유혹을 이길 힘을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적 예배에서 사용될 목적이 아닙니다. 오직 개인의 영적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반면, 은사로서의 방언은 다릅니다. 통역이 따르고, 예언이 되며, 치유와 축사, 계시가 동반됩니다. 이 방언은 소수에게 주어지며, 그 자체가 사역의 무게를 지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은사를 경계하게 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은사를 지식 없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수술용 칼은 생명을 살리지만, 아이 손에 들리면 위험한 흉기가 됩니다. 문제는 칼이 아니라, 사용자입니다. 은사는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기능만이 아니라,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유익이라는 큰 틀 안에서 다듬어져야 합니다. 은사는 열매를 요구합니다.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결과가 아니라, 성도가 온전해지고, 교회가 세워지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은사는 지식과 절제 없이는 결코 안전하지 않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이 말씀은 오늘 은사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방언을 하면서도 의미를 모르고, 은사를 말하면서도 목적을 모르면 결국 남는 것은 혼란과 실망뿐입니다. 그러나 영적 지식 위에 세워진 은사는 다릅니다. 교회를 살리고, 성도를 보호하며,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냅니다.

우리가 먼저 점검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은사를 부러워하고 있는가, 아니면 은사의 무게를 알고 있는가,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방언을 은사처럼 사용하려 하면서, 정작 영을 세우는 기도로는 소홀히 하고 있지 않은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안전한 영적 도구입니다. 이 도구로 영이 강건해질 때, 하나님은 때에 따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은사도 맡기십니다. 은사는 목적이 있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출발점은 지식과 겸손인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이 기초 위에 설 때, 은사는 더 이상 교회를 아프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교회를 살리는 하나님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